다문화 가정에서 믿음을 키운다는 것

 

공항 입국장 문이 열릴 때마다 서로 다른 언어가 공기 중에 섞여 흐른다. 어떤 아이는 한국어로 엄마를 부르고, 잠시 뒤 아빠에게는 영어로 대답하고, 할머니에게는 서툰 한국어와 몸짓으로 마음을 전한다. 한 집 안에 두 나라가 들어와 있고, 한 식탁 위에 두 개의 시간이 놓여 있는 삶. 다문화 가정에서 믿음을 키운다는 것은 이 복잡한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조용히 건너가며 한 분의 하나님을 함께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다문화 가정의 하루는 늘 작은 통역으로 시작된다. 어린아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때 엄마는 자기 언어로 번역해 듣고, 아빠는 또 다른 언어로 묻는다. 때로는 한 문장 안에 세 개의 언어가 섞인다. 문법으로는 틀린 말이지만, 그 안에는 이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의 결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아이가 한국어를 조금 더 잘하게 되면 그만큼 엄마의 언어가 밀려나는 것 같아 마음이 서늘해질 때도 있고, 반대로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까 불안해서 아이에게 모국어를 줄이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도 있다. 다문화 가정의 부모는 언제나 둘 사이를 오가며 죄책감과 걱정과 기대를 같이 안고 산다.

그런데 믿음은 바로 이 애매한 경계에서 시작된다. 어느 언어를 먼저 가르쳐야 하는가, 어느 문화를 우선해야 하는가를 정답처럼 말해주는 대신,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너와 너의 집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물으신다. 예배를 드릴 때 아이에게 어느 언어로 기도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부모의 마음, 성경 이야기를 들려줄 때 아이가 알아듣지 못해 답답함을 느끼는 순간, 친정과 시댁 어느 쪽의 문화에 맞춰 명절을 보내야 하는지 갈등하는 자리에서 믿음은 조금씩 모양을 드러낸다. 신앙은 완벽한 언어 선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같은 분께 시선을 모으는 순간에 자라기 때문이다.

다문화 가정의 식탁을 떠올려 보면 믿음이 자라는 자리가 얼마나 구체적인지 알 수 있다. 한쪽에는 김치와 국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향신료 냄새가 진하게 나는 요리가 놓인다. 아이는 어느 쪽에 젓가락을 먼저 뻗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둘 다 조금씩 맛본다. 부모의 문화와 음식, 기억과 추억이 한 식탁 위에서 섞이는 이 장면은 사실 작은 예배와도 같다. 하나님이 두 나라의 역사를 통과하여 이 가족을 한 자리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 식탁은 단순한 밥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증언하는 자리로 바뀐다. 부모가 서로의 음식을 향해 “이건 네가 자란 맛이고, 이건 내가 자란 맛이야. 둘 다 우리 집의 맛이 되었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아이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부담 대신 “나는 두 세계를 함께 물려받은 사람”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그 정체성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어 줄 때, 다문화 가정의 식탁은 자연스럽게 믿음의 교실이 된다.

교회 안에서 다문화 가정이 느끼는 낯섦은 때때로 깊다. 예배 시간에 목회자의 말이 너무 빠르거나 어려워서 잘 들리지 않을 때, 교제 시간에 모두가 같은 농담을 하고 같은 유년 시절의 추억을 공유할 때, 그 안에서 혼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질 수 있다. 아이는 교회학교에서 한국어로만 진행되는 활동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표현하지 못해 답답해하며 조용히 뒤로 물러서기도 한다. 이때 믿음의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가정이 우리와 다르다”고 느끼는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은 이 가정을 통해 무엇을 보여 주시려는가”를 묻는 것이다.

성경 속 하나님은 언제나 한 민족만 부르시는 분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땅과 자손에 관한 약속이었지만 그 끝에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 함께 있었다. 예수님 주변에는 유대인만 있지 않았다. 사마리아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로마 백부장과 같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하나님 나라의 움직임은 늘 경계선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다문화 가정이 한국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단지 시대가 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경계 위에 서 계신다는 신호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의 눈물을 보고 들으시는 분도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자주 “나는 어디 사람일까”라는 질문을 안고 자란다. 학교에서는 한국인으로 살아야 할 것 같고, 집에서는 또 다른 문화와 언어가 요구된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느낌이 마음 한구석에 남을 수 있다. 이때 부모가 “너는 한국인도 되고, 저 나라 사람도 되고, 둘 다 될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그 말 뒤에는 “그러나 무엇보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고백이 이어져야 한다. 국적과 언어, 환경은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이 바뀔 수 있지만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가장 깊은 대답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만 온전히 세워지기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 기도할 때, 모든 문장을 한 언어로 완벽하게 맞추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아이가 알고 있는 단어를 섞어 쓰더라도,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게 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부모가 자기 모국어로 기도하고, 아이가 한국어로 짧게 “하나님, 오늘도 함께 해 주세요”라고 덧붙여 기도하는 모습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풍경이다. 어느 나라 말로 부르든 하나님은 같은 귀로 들으신다. 이 사실을 아이가 몸으로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다면, 그 가정은 언어의 차이를 지나 믿음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다문화 가정이 겪는 상처도 분명히 있다. 학교에서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거나, 부모의 발음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날도 있다. 길에서 듣기 싫은 말을 듣고 돌아와 문을 닫고 울고 싶을 때도 있다. 이때 믿음은 도망치게 하는 위로가 아니라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를 알려주는 시선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너를 뭐라고 부르든, 하나님은 너를 창조하실 때 이미 너를 알고 계셨어”라고 말해주는 부모의 한마디는 아이 안에 깊은 안전지대를 만든다. 그 안전지대가 있으면 세상 어디로 가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내적 집이 생긴다. 다문화 가정의 신앙은 바로 이 내적 집을 함께 지어 가는 과정이다.

다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통계와 제도, 사회적 이슈의 언어로만 다뤄지기 쉽다. 그러나 다문화 가정의 신앙은 언제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얼굴에서 시작해야 한다. 어느 날 밤, 피곤한 몸을 이끌고도 아이에게 짧은 한 구절의 말씀을 읽어 주는 엄마, 서로 다른 언어로 축복의 말을 건네며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아빠, 서툰 한국어로 교회에 앉아 조용히 찬양을 따라 부르는 외국인 성도. 이런 장면들이 쌓여서 한 가정의 믿음을 만들고, 그 믿음이 결국 한 나라의 신앙 지형을 조금씩 바꾸어 간다.

다문화 가정에서 믿음을 키운다는 것은 “우리도 다른 가정처럼 정상적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에서 출발할 수 있지만, 그 끝은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통해 이 시대에 보여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싶다”는 고백으로 향하게 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던 가족이 한 이름을 함께 부를 때, 서로 다른 시간을 통과해 온 두 사람이 한 말씀 앞에 함께 서 있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한 분의 영이 그 집안 전체를 조용히 묶어 가신다. 이 흐름을 믿고 한 걸음씩 내디딜 때, 다문화 가정은 더 이상 약한 위치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넓이를 증언하는 증인이 된다.

한 집 안에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한 가지를 보여 주신다. 언어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자라온 배경이 달라도, 한 가정이 함께 붙들 수 있는 이름이 있을 때 그 집은 결코 흩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다문화 가정은 이 진리를 가장 먼저, 가장 깊이 배우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교회와 사회 역시 하나님 나라의 넓이와 깊이를 새롭게 배우게 된다.

매일말씀저널 | 다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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