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나라에서 ‘집’이 되어 주는 복음

 

처음 낯선 나라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대개 공항의 풍경을 떠올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더 오래 남는 장면은 공항이 아니라 그날 밤 홀로 앉아 있던 작은 방이다. 창밖에서는 아직 익숙해질 수 없는 거리의 소리가 흐르고, 방 안에는 짐을 풀지 못한 가방 몇 개와 낯선 냄새가 가볍지 않게 섞여 있다. 이곳이 언젠가 집이 될 거라고 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스스로도 그 말을 쉽게 믿지 못한 채 이 나라에서 내가 정말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천천히 무게를 더해 간다.

낯선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기준을 다시 배우는 일에 가깝다. 길에서 건네지는 말의 속도와 목소리의 높낮이, 잔을 올리는 방식과 눈을 맞추는 시간, 심지어 미소를 짓는 타이밍까지 하나씩 낯설게 다가온다. 계산대 앞에서 줄을 서며 뒤의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까 서둘러 카드를 내밀다 잘못된 카드를 꺼내 다시 돌려받는 순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서류 하나를 발급받기 위해 몇 번씩 같은 길을 되돌아와야 할 때 마음은 금방 지친다. 단어 하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하루의 계획이 통째로 틀어지는 날이면 이곳이 정말 내가 머물러도 괜찮은 자리인지 묻게 된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그 자리를 향해 다가온다. 복음은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을 위한 소식이 아니라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처음 들려오는 하나님의 목소리다. ‘낯선 나라에서 복음이 집이 되어 준다’는 말은 교회라는 건물 하나가 더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삶의 한가운데에 하나님이 먼저 자리를 잡아 주신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동네를 살피고 집 구조를 비교하고 비용을 계산하지만 하나님은 먼저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디에 있든 내가 너와 함께한다. 너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낯선 나라에서 처음 예배당 문을 열었던 날을 기억한다. 안에는 이미 오래 알고 지낸 가족처럼 서로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말이 서툴러 조용히 앉아 있는 이들도 있었다. 찬양의 언어는 낯설었지만 멜로디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목 안에서 뜨거운 것이 천천히 올라왔다. 단어는 모두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예배하는 모습들 사이에서, 이곳이 완전히 모르는 나라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조금씩 피어오른다. 복음은 먼저 말이 아니라 공기를 바꾼다. 낯설었던 공간이 안전한 자리로 변하는 시간, 바로 그때 집이라는 감각이 시작된다.

집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몸을 쉬게 하는 장소와 마음이 풀어지는 자리다. 낯선 나라에서 집이 쉽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대개 두 번째 때문이다. 밤이 깊어 불을 끄고 누웠을 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얼굴을 찾고 싶어지지만 그 얼굴이 쉽게 떠오르지 않을 때 사람은 공중에 매달린 사람처럼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 준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생각들, 조국을 떠나며 가족에게 말하지 못한 두려움들, 낯선 땅에서 자존심을 지키려다 더 깊게 다친 마음까지 복음은 모두 품에 안아 주는 소식이다. 그분 앞에서는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서툰 언어로 기도해도 괜찮다.

‘복음이 집이 된다’는 말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우리의 언어를 배우러 오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언어만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과 눈물과 한숨을 몸으로 익히신 분이셨다. 사람들과 함께 걸었고 그들의 식탁에 앉으셨으며 그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셨다. 그래서 외국인 배우자가 서툰 한국어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버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문법보다 마음이 먼저 하늘로 올라간다. 복음은 인간에게 새로운 언어를 강요하는 소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언어를 기꺼이 배우셨다는 소식이다. 이 사실을 믿게 되는 순간 사람은 어느 나라에 있든 기도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집을 찾은 사람이다.

다문화 가정에게 복음은 특별한 의미를 더한다. 같은 집 안에서 서로 다른 고향을 가진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 시작하면 각자의 몸과 기억 안에는 자신을 만든 나라의 습관과 냄새가 남아 있다. 한 사람은 어린 시절의 골목 소리를 그리워하고, 다른 사람은 이 나라의 학교 종소리를 듣고 자랐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말이 막힐 때가 있다. 상대가 겪어 보지 않은 것을 어떻게 온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복음은 또 한 가지 길을 보여 준다. 상대가 전부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길. 대신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계신 하나님이 이미 두 사람 사이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각각의 시작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간격을 천천히 좁힌다.

낯선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도 복음은 집의 모양을 다시 가르쳐 준다. 아이는 학교에서 또래들의 말과 웃음을 배우고, 집 안에서는 부모의 언어를 오가며 자란다. 어느 날 아이가 “나는 어디 나라 사람이야?”라고 묻는다면 그 질문 뒤에는 이 세상 어디에 서야 할지 모르는 마음의 흔들림이 숨어 있다. 이때 복음은 단 하나의 새로운 대답을 준비한다. 너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대답이다. 국경과 언어는 살아가는 방식을 정리해 줄 수 있지만 존재의 근본을 결정짓지는 못한다. 부모가 이 사실을 먼저 믿기 시작할 때 아이에게 해 주는 말도 달라진다. 너는 두 나라에 속하지만 그보다 깊은 자리에서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는 고백은 아이의 마음 안에 흔들리더라도 돌아올 수 있는 집 하나를 만들어 준다.

낯선 나라에서 복음을 붙든다는 말은 현실을 잊고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날카롭게 현재를 바라보면서도 절망에 잠식되지 않는 길을 배우는 일이다. 서류 문제와 경제적 무게와 문화적 오해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날에도 하나님이 이 가정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어오면 사람은 모든 일을 해결하지 못했어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억지로 감사할 이유를 찾지 않아도 된다. 다만 하나님이 여기까지 함께 오셨다는 사실 하나를 붙잡고 천천히 숨을 내쉴 수 있게 된다. 이 작은 고백이 반복될 때 낯선 땅에 내디딘 발걸음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집을 향해 나아간다.

어쩌면 인간의 인생 자체가 큰 의미의 타국살이일지 모른다. 성경이 우리를 나그네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땅에서 뿌리 내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이 땅 어디에서도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에 가깝다. 그래서 낯선 나라에서 복음을 붙드는 사람은 특별한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먼저 배우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언제나 어딘가 낯선 곳을 지나고, 어떤 자리에서도 마음 한편에 완전한 집을 향한 그리움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 그리움이 헛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하나님 안에서 완성될 집이 분명히 있다고 알려 준다.

낯선 나라에서 ‘집’이 되어 주는 복음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이 말이 조금씩 믿어질수록 사람은 국경과 언어와 제도의 복잡함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 외로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그 외로움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생기고, 두려움이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더라도 그 두려움을 품고 함께 걸어가시는 분이 계시다는 믿음이 생긴다. 집은 결국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이다. 낯선 나라에서 복음이 집이 되어 준다는 것은 그 집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천천히 알아가는 과정이다.

매일말씀저널 |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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