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라는 궤도 위를 달리다 보면, 예고 없이 선로가 끊긴 듯한 칠흑 같은 구간을 만난다. 차라리 명백한 악행을 저질렀다면 인과응보의 논리로 스스로를 납득시키기라도 할 텐데. 성실하게 쌓아올린 일상이 단 한 번의 파도로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원망 섞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흔히 ‘축복’을 무탈함과 동의어로 착각한다. 사업이 번창하며, 건강검진 결과지에 아무런 경고도 뜨지 않는 상태를 기뻐하시는 증거라 믿는다. 반대로 질병, 실패, 관계의 파국은 곧 하나님의 부재이거나 징계라 단정 짓는다. 그래서 고난받는 이를 보면 겉으로는 위로하지만, 속내 깊은 곳에서는 그가 저질렀을지 모를 은밀한 실수를 가늠해 본다.
성경 속 욥의 비극을 보자. 우리는 욥이 겪은 끔찍한 상실에만 주목하지만, 욥의 고난은 사탄의 공격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천상 회의에서 사탄에게 먼저 욥의 이름을 꺼내며 자랑한 존재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었다.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한 자가 없느니라.”
이건 하나님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던진 위험천만한 승부수였다. 하나님은 확신했다. 가진 것을 모두 뺏기고 잿더미 위에 나뒹굴더라도, 욥이라는 인간만큼은 결코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을 거라는 지독한 믿음. 그러니 욥이 흘린 피눈물은 죄에 대한 대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이 사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내밀었던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였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왔다는 건, 하나님이 우리를 ‘감당할 수 있는 자’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나를 믿어준다는 것의 무게
신앙의 주체를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는 늘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 나의 확신, 나의 열심, 나의 기도가 신앙의 척도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진짜 신비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믿어주는 것”에 있다.
뼈아픈 통찰을 마주해야 한다. 삶에 고난이 하나도 없다면, “아,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는구나”라고 안도할 게 아니라, “내가 아직 건드리면 부러질 만큼 믿음이 없나 보다”라고 의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곧바로 넘어져 버릴 것을 아시기 때문일 수도 있다. 평온한 삶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아직 감당할 수준이 되지 않아서’ 유예된 시간일 수 있다는 서늘한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휘관은 갓 입대해 총 잡는 법도 서툰 신병에게 무거운 배낭을 지우지 않는다. 생사가 오가는 최전방, 숨소리조차 죽여야 하는 적진 깊숙한 곳으로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을 보낸다. 어둠 속에서 홀로 고립되더라도, 지원 사격이 늦어지더라도, 결코 작전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 돌아올 거라는 신뢰가 있는 자에게만 감당하기 힘든 사지가 허락된다.
지금 삶이 숨 쉴 틈 없이 팍팍한가? 벼랑 끝으로 내몰린 기분인가? 그렇다면 낙심할 게 아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영적 최정예 요원으로 대우하고 있다는 증거다. “너라면 이 절망 속에서도 나를 놓지 않을 거야. 너라면 이 아픔을 기도로 씹어 삼킬 거야.” 내가 겪는 고통의 무게는, 하나님이 나에게 걸고 있는 기대의 무게와 정확히 비례한다.
타인의 고난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
이 매커니즘을 이해한다면, 타인의 고난에 대해 함부로 혀를 놀릴 수 없게 된다. 누군가 깊은 병환 중에 있거나, 사업이 망했거나, 가정이 풍비박산 났을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욥의 세 친구들이 저질렀던 폭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낡은 도덕책을 펴들고 인과응보의 논리로 욥을 정죄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욥의 손을 들어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훈수가 아니라 침묵이며, 판단이 아니라 함께 울어주는 것이다.
나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믿음에 뿌리를 박다
결국 신앙의 뿌리는 ‘내’가 아니다. 인간의 의지는 갈대처럼 흔들리고, 감정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널을 뛴다. 내가 쥐고 있는 확신이라는 밧줄은 시련의 칼바람 앞에서 모래성처럼 끊어지기 마련이다.
우리 신앙의 뿌리는 ‘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고,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나를 믿고 이 상황에 두셨다는 그 사실. 하나님의 믿음이 나에게 밀려들어 올 때, 비로소 우리는 내 능력을 초월하는 힘으로 현실을 버텨낼 수 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를 믿고 있다. 내가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주님은 “나는 너를 안다, 너는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확증임과 동시에, 죄인인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하나님의 자신감이기도 하다.
아픔을 훈장으로 바꾸는 태도
너무 편안한 삶을 부러워하지 마라. 광야의 백향목은 비바람을 맞으며 거목으로 자라난다. 하나님이 나를 흔들고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신앙인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바뀌어야 한다. “주님, 저를 이토록 믿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당신의 그 신뢰가 틀리지 않았음을 내 삶으로 증명하게 하소서”라는 성숙한 고백으로. 나의 고통은 하나님의 기대다. 그리고 그 기대는 결코 배신당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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