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에 빠진 신자, 회개의 문턱에서 망설일 때

– 자격 없는 자를 향한 은혜의 문턱 앞에서 –

“내가 과연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신자에게 가장 깊은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물음 중 하나다. 특히 죄를 반복하고, 그것이 양심의 저항을 넘어 신앙의 뿌리를 흔들기 시작할 때, 신자는 마치 자기 안에 두 인격이 공존하는 것 같은 내면의 분열을 경험한다. 죄를 뉘우치는 마음과, 그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는 마음. 이 둘은 동시에 존재하면서도 서로를 부정한다. 어떤 신자는 이 모순을 감당하지 못하고 죄책감에 짓눌려 신앙을 포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스스로를 정죄하며 하나님과의 거리를 점점 더 벌리기도 한다. 회개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길을 밟는 데 필요한 믿음과 용기가 마치 닫힌 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회개를 단순한 마음의 결단으로 여기지만, 실상 회개는 매우 능동적이고 치열한 행위다. 그것은 단지 눈물로 자기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등을 돌려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는 선택이며, 동시에 그 선택에 따르는 후속 행동까지 포함하는 깊은 신앙의 행위다. 그러나 그 시작점에서 가장 큰 방해물이 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죄책감’이다. 죄를 깨달았다는 사실 자체는 신앙의 건강함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죄책감이 길어지고 그 자체에 갇히게 되면, 회개의 길은 차단된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그런즉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이 말씀은 회개한 자에게 정죄가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며, 동시에 죄를 깨달은 자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초대의 말씀이기도 하다.

문제는 신자들이 이 진리를 지식으로는 믿으면서도, 실제 감정과 삶의 영역에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들이 마음속으로 외치는 말은 이렇다. “나는 너무 멀리 왔다.”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까지는 안 보실 거야.” “나 같은 반복적인 죄인은 회개할 자격조차 없다.” 이 말들은 외형상 겸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복음의 본질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회개는 자격 있는 자가 드리는 것이 아니다.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는 자가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 자격 없는 자를 향해 먼저 손을 내미신다.

성경 속 인물들의 삶은 이 사실을 명백히 증거한다. 베드로는 주를 세 번 부인했다. 그는 울며 뛰쳐나갔다. 그 죄책감은 감히 다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무게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는 그런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셨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회개의 기준은 죄의 무게가 아니다. 사랑의 회복이다. 하나님은 죄의 목록보다, 다시 일어나서 주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을 귀하게 보신다.

다윗 역시 죄의 무게를 누구보다 절감한 인물이었다. 간음과 살인의 죄는 율법에 따라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와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갔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라는 고백은 단순한 자기연민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는 절박한 탄식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를 찾지 않으신다. 오히려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자비를 구하는 자를 기쁘게 받으신다. 그것이 회개의 본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존심이 그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책감이 신앙심처럼 포장되어 우리를 고상하게 보이게 만들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용서보다 자기 비난에 더 익숙해진 이기적인 정서가 자리잡고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신자는 하나님의 긍휼보다 자신의 실망을 더 크게 여긴다. 이것은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음의 능력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보다 더 크다고 여겨지는 자기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그 죄책감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원수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죄로 유혹한 후, 그것을 빌미로 정죄한다. 회개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도리어 회개의 가능성을 아예 끊어버리기 위해서다. 그는 우리의 과거를 들춰내고, 실패를 반복적으로 떠올리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든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을 고백해도 “네가 또 실패할 걸?”이라는 음성을 속삭인다. 이 목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이 아닌 정죄의 소리에 이끌려 스스로를 하나님에게서 고립시키게 된다. 이런 내적 작용은 대부분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지만, 그 결과는 매우 분명하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 것.’ 이것이 죄책감의 최종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죄인과의 관계를 포기하시지 않는 것도 진리다. 복음은 바로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주어진 약속이다. 십자가는 죄를 무효화시키는 면죄부가 아니라, 죄의 형벌을 실제로 대신 치르신 사건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괜찮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값을 대신 치렀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 복음의 현실을 믿는 자는 회개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 자기 죄를 합리화하지도 않고, 죄책감에 빠지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앞으로 나아간다.

죄책감이 길어질수록 인간은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회개는 연민이 아니라 결단이다. 상한 심령이란 자기 비난에 빠진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태도다. 회개는 자기 부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전인격적 전향이다. 죄책감은 종종 과거를 붙들게 만들지만, 회개는 미래를 준비하게 만든다. 우리는 죄로부터 달아나는 사람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을 믿는 자의 걸음이다.

반복된 실패 속에서도 은혜를 붙드는 사람들

회개의 문턱을 겨우 넘어선 신자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현실은, ‘변화’가 생각보다 더디다는 점이다. 마치 큰 죄에서 돌이켜 결단했을 때는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처럼 느껴지지만, 삶의 현장은 여전히 같은 유혹과 연약함 속에 놓여 있다. 죄를 이긴 것 같은 순간은 짧고, 다시 넘어지는 경험은 더 길게 반복된다. 그렇게 실패가 반복될수록, 한 번 용서받은 은혜마저 부정하고 싶어진다. 신자는 다시 말한다. “나는 똑같은 죄를 반복하고 있어. 하나님도 더 이상 용서하시지 않겠지.”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회개를 받지 않으시는 순간은, 우리의 실패가 기준이 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진실하지 않은 마음, 형식적인 회개만을 반복할 때 경고하신다. 회개의 진정성은 실패하지 않는 데 있지 않고, 넘어짐 가운데서도 다시 하나님을 찾는 데 있다.

성경은 신자의 반복된 죄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조차 고백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 그는 자신의 내면 안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 안의 죄와 싸울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상태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것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확실하게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가 외친 결론은 이렇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4-25). 죄와 싸우는 자는 자기 연민이나 자기 혐오에 빠지지 않고, 구원의 근원 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죄를 반복하는 신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향한 좌절보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뢰다. 하나님은 감정적인 존재가 아니시다. 인간처럼 실망하고, 지치고, 정을 떼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의 자비는 아침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은 영원하다(애 3:22-23). 이 사실은 단지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우리 회개의 근거가 되는 실제적인 복음의 약속이다. 우리는 그분의 성품에 기대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오늘도, 내일도, 또 실망스러운 나의 모습을 마주하는 날에도. 회개는 감정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함으로 가능해지는 신앙의 결단이다.

문제는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보다 자기의 감정을 더 신뢰한다는 데 있다. 마음이 무겁고 죄책감이 밀려올 때, “이런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건 오히려 신성모독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겸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중심적인 태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보다 자기의 실망을 더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태도이며, 결과적으로는 복음의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네가 기분이 괜찮아졌을 때” 돌아오라고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네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 사랑하셨고, 십자가를 통해 이미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두셨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감정의 깊이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 회개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진정한 회개 이후에도 넘어질 수 있음을 아신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하셨고, 그 말은 곧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이다. 회개는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신앙의 삶 전체에서 반복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행위이며, 우리의 본성이 아닌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믿고 붙드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반복적인 죄에 대한 절망은, 오히려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다시 열어야 할 이유다. 그 길은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길이 아니라, 끝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을 던지는 길이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회개는 철저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그 회개를 지켜보아 주는 영적 공동체의 시선은 많은 영향을 미친다. 안타깝게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조차 반복된 죄를 범한 이들을 향해 수군거리거나 정죄하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들은 죄에 빠진 자를 도우려 하기보다, 경계하고 단절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죄를 묵인하거나 방임해서는 안 되지만, 정죄의 언어로는 누구도 변화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신 방식은 언제나 사랑과 진리의 조화였다. 죄를 죄로 지적하면서도, 그 죄를 회개하는 자를 끝까지 안아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교회 역시 그런 시선을 회복해야 한다. 넘어지는 자를 기다려주고, 회개의 걸음을 동행해 줄 수 있는 공동체만이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다.

신자는 자주 넘어질 수 있다. 그 현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 넘어진 자리에서 어떤 목소리를 따르느냐는 것이다. 죄책감은 속삭인다. “다 끝났어. 또 이랬잖아. 하나님도 이제는 너를 보지 않을 거야.” 하지만 복음은 명확하게 외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너를 깨끗하게 하셨고, 지금도 하나님은 너를 향해 팔을 벌리고 계신다.” 우리가 따라야 할 소리는 어떤 것인가. 진실은 감정의 언저리에 있지 않다. 진실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다. 말씀은 말한다. “네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사 1:18). 이 약속이 회개의 진정한 근거이다.

신앙이란 단순히 죄를 이기는 삶이 아니다.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는 삶이다. 성도의 거룩함은 죄가 없는 데 있지 않고, 죄를 범한 이후에도 하나님께 돌아올 줄 아는 데 있다. 반복된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을 부르짖는 자, 자신의 실망감보다 하나님의 자비를 더 신뢰하는 자, 자기 죄의 크기보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더 크게 여기는 자 그들이야말로 회개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일회용이 아니다. 그것은 소진되지 않으며, 조건부로 지급되지 않는다. 예수의 피는 과거의 죄만 아니라, 오늘의 실수와 내일의 실패까지도 덮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 능력은 하나님을 향해 다시 손을 뻗는 자에게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므로 신자는 죄책감이라는 허상의 장막을 찢고,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거기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아니, 매번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이 복음이다.

매일말씀저널 |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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