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신앙, 그 안에 깃든 시작
신앙은 단순한 지속이 아니다. 믿는다는 것은 어제의 결단을 오늘 다시 선택하는 일이자, 반복되는 무너짐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일이다. 많은 이들이 신앙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식지 않는 열정’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신앙은 오히려 정반대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주 흔들렸고, 때로는 완전히 무너졌으며, 그 무너짐 속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났다.
다윗은 시편 곳곳에서 자신의 믿음과 회의를 동시에 토해냈다. 한 구절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다가도, 다음 절에서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친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불을 경험했지만,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는 광야로 도망쳐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았다. 베드로는 예수를 주라 고백했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그를 부인했다.
이처럼 성경은 무너지는 믿음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무너짐이야말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상한 마음을 가까이하시며, 통해하는 자를 구원하신다”(시 34:18). 상한 마음, 무너진 마음, 실패의 자리. 하나님은 그곳에 머무르신다. 신앙은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무너짐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움직임이다.
오늘날의 신앙도 다르지 않다. 빠르게 흐르는 뉴스, 고단한 일상, 번아웃과 무기력,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고통 속에서 믿음은 매일 조금씩 침식된다. 주일의 감격은 월요일의 냉소로 옮겨가고, 말씀의 결단은 일상의 피로 속에 희미해진다. 기도는 더딘 응답 속에 방향을 잃고, 교회는 습관이 되어버린다. 신앙은 뜨거운 감정이 아니라, 하루하루 겨우 붙들고 가는 끈처럼 느껴지곤 한다.
이럴 때 사람들은 말한다. “믿음이 약해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약해진 것이 아니라, 진짜 신앙의 시작일 수 있다. 의심하고 번민하며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자리가 오히려 믿음의 본질에 더 가까운 곳이다. 무너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붙들 이유조차 없다. 무너졌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의 손이 느껴진다.
현대 신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무너짐에 대한 이해다. 무너졌다는 사실이 곧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너짐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자신의 열심이었는지, 환경이었는지, 혹은 사람의 시선이었는지를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자리를 되찾게 된다. 신앙은 정답을 외우는 종교적 숙제가 아니다. 삶의 균열 속에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발견해 가는 여정이다.
우리가 무너졌다고 느끼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너지는 그 자리에 먼저 도착해 계시고, 말씀을 통해 다시 일으키시는 분이다. 그래서 무너진 자리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말씀을 다시 펼치는 일이다. 그 말씀이 당장은 아무런 울림 없이 지나가도 괜찮다. 말씀은 씨앗처럼 뿌려져 보이지 않는 깊이에서 자란다.
신앙은 눈에 보이는 감정이 아니라, 뿌리 내리는 진실한 행위다. 펼쳐진 말씀 앞에 앉는 그 자세 하나로, 이미 믿음은 다시 시작되고 있다. 한 청년이 있었다. 예배에 꾸준히 나가고, 기도도 성실히 하던 그는 어느 날 말했다. “기도가 안 된다. 말씀이 의미가 없다. 주일이 오는 게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의 말에는 자기 신앙이 끝났다는 절망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시작이었다. 고통스러운 정직함은 은혜의 문이다. 더 이상 스스로를 위장하지 않고, 더 이상 열심으로 자신을 부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는 그 자리. 그곳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일하신다. 신앙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매일의 선택이다. 어제 무너졌더라도, 오늘 다시 일어나는 것이 신앙이다.
그리고 그 일어섬은 내 결단이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님은 무너짐을 허락하시고, 그 무너짐 속에서 은혜의 출구를 열어 가신다. 신앙은 무너짐 없이 자라지 않는다. 넘어지고 좌절하며, 다시 주님을 붙들고야 말 때 비로소 믿음은 살아 있는 실재가 된다. 넘어졌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넘어졌을 때 무엇을 향해 손을 뻗느냐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자기 실망에 빠져 떠나가고, 어떤 이는 끝내 주님께 시선을 돌린다. 신앙은 그 차이에서 갈린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신다. 기다리시는 분이다. 스스로 일어설 힘이 없어도 괜찮다. 일어설 의지만 남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충분하다고 말씀하신다. 신앙은 매일 무너지고 매일 일어나는 것이다. 이 반복 속에서 우리는 신앙을 배운다.
다시 펴는 말씀, 다시 무릎 꿇는 기도, 다시 고백하는 믿음. 그 단순한 반복이 신앙을 지탱한다. 고요한 절망의 밤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붙든다.” 신앙은 그 음성을 다시 듣기 위해, 오늘도 무너짐 위에 서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삶이다.
일어섬은 결심이 아니라 은혜다
무너짐은 익숙하다. 하지만 일어섬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넘어지는 일은 저항 없이 반복되지만, 다시 일어서는 일에는 늘 힘이 필요하다. 때로는 그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신앙은 종종 벽에 부딪힌다. 마음은 지쳤고, 의지는 꺾였고,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그럴 때 사람들은 스스로를 향해 말한다. “이젠 정말 끝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결단이 아니다. 회복된 감정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신앙은 인간의 끈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매일 무너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애가는 고난의 시대에 쓰인 탄식이다. 성읍은 무너졌고, 백성은 흩어졌으며, 희망은 메마른 땅처럼 사라진 듯 보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시인은 말했다. “주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인간의 무너짐은 반복되지만,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도 그에 맞서 반복된다. 매일 무너질 수 있는 이유는, 매일 새롭게 쏟아지는 긍휼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무너질 것을 이미 아신다. 그러나 그 무너짐을 죄악으로만 보시지 않는다. 거기에서 다시 시작되도록, 은혜를 준비하신다.
신앙의 길에서 가장 큰 기적은 매일의 일상 속에 숨어 있다. 다시 말씀을 펼치는 일, 다시 기도를 시작하는 일, 다시 예배의 자리에 앉는 일. 이 소소한 반복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다. 사람은 죄를 반복하지만, 하나님은 긍휼을 멈추지 않으신다. 그 은혜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인간의 불성실함을 무력화시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성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진실함을 찾으신다. 다시 돌아오는 마음, 다시 고백하는 입술, 다시 주를 향하는 시선을 기뻐하신다.
부활 이후의 베드로는 단지 용서받은 제자가 아니었다. 그는 다시 불러 세움 받은 사도였다. 주님은 실패한 그를 따로 만나셨고, 물가에서 떡을 구워 함께 나누셨으며, 세 번의 질문으로 그를 다시 일으키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은 책망이 아니었다. 회복의 문장이었다. 사람은 넘어졌지만, 하나님은 관계를 끊지 않으신다. 인간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지만, 하나님은 얼굴을 들게 하신다. 신앙은 그 손길에 반응하는 삶이다.
신앙은 점진적인 길이다. 하루에 완성되지 않는다. 다시 일어서는 일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일어섬이 오늘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자는 매일 은혜를 구해야 한다. 오늘도 말씀 앞에 앉고, 오늘도 기도의 입을 열고, 오늘도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반복은 형식이 아니다. 생명의 호흡이다. 그 반복이 깨질 때 신앙은 숨이 막힌다. 그러나 다시 반복할 수 있다면, 신앙은 다시 살아난다. 넘어졌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다. 매일 은혜가 새로우니, 매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많은 신자들이 완전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한다. 감정은 식었고, 기도는 메말랐고, 교회 가는 발걸음도 무거워졌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를 자격 없는 자로 느낀다. 그러나 자격을 갖춘 자는 아무도 없다. 신앙은 자격이 아니라 은혜로 서는 자리다. 다시 시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패한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실패 속에서 그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다시 일하신다.
일어섬은 감정의 회복이 아니다. 그것은 방향의 회복이다. 무너졌던 자리가 끝이 아니라, 돌아설 지점임을 깨닫는 순간 신앙은 다시 움직인다. 눈물 없는 기도라도 괜찮고, 느껴지지 않는 예배라도 괜찮다. 그 자리에 나아오는 것이 곧 은혜다. 신자는 감정을 따르지 않는다. 진리를 따른다. 진리는 말한다.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여덟 번째 일어설 자는 의인이다”(잠 24:16). 넘어졌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났느냐는 것이다.
예배는 결심의 자리가 아니다. 은혜를 입는 자리다.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조차 그분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시작하신 일을 끝내시는 분이시다. 흔들림 없는 자가 아니라, 흔들려도 돌아오는 자를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그래서 신앙은 자기 완성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는 길이다. 나는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나는 무너져도, 하나님은 무너지지 않으신다.
오늘도 어떤 이의 신앙은 흔들리고 있다. 말씀은 멀게 느껴지고, 기도는 공허하다. 예배는 의무처럼 흘러가고, 공동체는 버겁기만 하다. 그러나 그 마음속 어딘가에 “다시”라는 두 글자가 살아 있다면, 그 믿음은 죽지 않았다. 하나님은 오늘도 일어나길 기다리신다. 신앙은 특별한 순간에 세워지지 않는다. 일상의 무너짐과 반복되는 기도의 자리 속에서 조금씩 세워진다. 내일도 우리는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하나님의 은혜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신앙은 매일 무너지고, 매일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반복 속에 계신다. 무너짐을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섬을 지나치지 말라.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우리는 그 손을 향해 오늘도 다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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