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졌다는 자들이 있다. 신앙이 흔들리고 기도가 멈추고 예배조차 감정 없는 습관으로 남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얼마나 약한 사람인지 절감했고 내가 세웠던 모든 믿음의 구조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고 고백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신앙의 실패로 여긴다 이전보다 나빠졌고 후퇴했고 믿음을 저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무너짐은 정말 실패인가? 아니다, 무너짐은 신앙의 실패가 아니라 신앙의 구조 그 자체다. 그것은 피해야 할 실수가 아니라 반드시 지나야 할 진실이다. 무너짐 없이 하나님은 실제가 되지 않는다 무너지기 전까지는 우리는 여전히 나를 믿는다 기도를 하면서도 나의 의지를 말씀을 읽으면서도 나의 논리를 예배를 드리면서도 나의 경건을 신뢰한다. 그래서 무너져야만 한다. 하나님이 만져지기 위해서는 먼저 나라는 구조가 부서져야 한다.
창세기 3장은 인류 최초의 무너짐을 증언한다. 아담과 하와는 단지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자유를 선택했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선택했다. 그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존재의 뿌리부터 하나님을 벗어난 붕괴였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체하고자 했다 그 무너짐의 결과는 단지 에덴에서 쫓겨난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신앙 구조가 어그러진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이후의 모든 무너짐은 ‘실수’가 아니라 ‘현상’이다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중심에 둘 때 그 신앙은 반드시 무너진다. 아무리 화려한 헌신과 순종이라도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무너짐은 죄책감으로 덮을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통찰로 직면해야 할 영적 해부다.
베드로는 무너졌다. 그것도 철저하게. 그는 닭이 울기 전 세 번 예수를 부인했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예수의 시선이 그를 향했고 베드로는 밖에 나가 통곡했다. 그 장면은 단지 제자의 배신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했고 주는 그리스도라 고백했고 물 위를 걸었고 변화산에 함께 있었고 죽기까지 따르겠노라 다짐한 자였다. 그런 그가 무너졌다. 그것은 예수를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자가 가장 크게 무너진 자리였다. 무너짐은 믿음 없는 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의 가장자리 헌신과 확신의 끝에서 더 깊은 무너짐이 발생한다. 그것은 거짓된 믿음의 붕괴가 아니라 진짜 믿음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신앙은 중심의 문제다 겉모습이 경건할수록 중심은 감춰진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하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도 ‘나’라는 구조 위에 신앙을 쌓는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결국은 나의 사명 나의 성취 나의 만족을 위해 신앙이 동원된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이 아니라 나의 뜻을 이뤄달라는 요구로 바뀌고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내 삶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신앙이라는 체계를 믿게 된다. 그 체계는 오래 버틴다 사람의 노력과 규칙과 열심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구조는 언젠가 무너진다. 그리고 그 무너짐은 충격처럼 오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당신 없이 세워진 경건을 오래 두지 않으신다 오직 당신만 남게 하시기 위해 당신 없는 구조는 반드시 무너뜨리신다.
무너짐은 감정의 붕괴가 아니다. 그것은 논리의 붕괴다. 내가 세운 신앙의 논리가 무너지고 나의 계획과 확신이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이 무너짐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실제가 된다 하나님은 단지 이론이 아니고 개념도 아니며 정보도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이며 관계이고 만져짐이다. 그러나 자아가 살아 있는 한 하나님은 멀다 내가 붙잡은 확신이 온전할수록 하나님은 추상적이다 믿음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 그간의 모든 경건과 헌신은 허상이 되고 만다. 이것이 무너짐의 본질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통과이지만 가장 필연적인 은혜다. 무너짐은 신앙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는 무너짐을 실패로 여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자기합리화로 무너짐을 부정하고 감정으로 무너짐을 덮으려 한다 그러나 무너짐은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예정된 은혜다 하나님 없이도 버틸 수 있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이미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기 위해 하나님 없는 구조를 반드시 허무신다. 그 무너짐은 징벌이 아니라 사랑이다. 무너뜨리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무너짐은 사람이 감당하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시는 사건이다. 그 무너짐을 통과하지 않고는 하나님은 실제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무너짐을 통해 하나님을 듣게 되고 무너짐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진다
하나님 없이도 견고하게 유지되는 신앙은 착각이다. 아무리 오래 버티고 아무리 열매가 있어 보이며 아무리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신앙일지라도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것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 없는 경건은 오래 견디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만을 신뢰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너지게 하신다 실패하게 하시고 멈추게 하시고 혼란을 경험하게 하신다. 신앙의 의욕이 꺾이고 기도의 입술이 닫히고 말씀 앞에서도 감동이 없는 무력감에 빠지게 하신다. 그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 지어올린 구조를 하나님이 친히 무너뜨리시는 은혜 때문이다.
이사야 30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무너짐을 “무너진 담이 불시에 순식간에 무너짐 같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이 무너짐은 단지 인간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작정하신 붕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뜻을 앞세울 때 하나님은 그들의 형식적인 경건을 무너뜨리신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는 안정은 결코 진짜 안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세운 구조 안에서 안심하려 하고 종교적 열심과 사역의 분주함으로 자기 믿음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의 구원은 회개하고 조용히 있음에 있고 너희의 힘은 잠잠히 기다림에 있으려니와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회개와 조용함 잠잠한 기다림. 이 세 단어는 오늘날 가장 낯선 신앙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무너짐은 그 낯선 자리로의 초대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많이 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멈추기를 원하신다. 스스로 세운 자기 확신의 건물을 허물고 오직 주만 바라보는 그 자리에까지 내려오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무너짐은 회복을 위한 사전 단계가 아니다. 무너짐 자체가 회복이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이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붙들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마지막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구한다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고 더 이상 자랑할 것이 없고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을 때에야 비로소 마음이 내려앉는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만져지신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말할 수 있었고 가르칠 수 있었고 설명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붙든다’. 그분이 아니면 살 수 없기에.
무너짐은 자아가 꺾이는 일이다 자아는 오랫동안 축적된 신앙의 기억 속에 숨어 있다. 나는 기도했고 예배했고 말씀을 지켰고 사역도 했다. 그래서 나는 견고하다. 그러나 그 견고함이 자아를 지탱하는 구조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무너뜨리신다. 하나님이 없는데도 유지되는 경건은 결국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다 진짜 믿음은 자신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지키는 믿음은 나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이 지키는 믿음은 나를 다시 살린다. 무너짐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가 만든 경건이 무너지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생명이 다시 시작된다.
베드로는 무너졌기에 사도가 되었다. 닭이 울던 그 새벽 예수는 돌아서서 그를 바라보셨다 아무 말 없이 단지 눈빛으로. 그 눈빛은 정죄의 시선이 아니었다. 분노의 시선도 아니었다. 그 시선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베드로는 통곡했다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 자신이 무엇을 붙들고 있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자기 믿음에 대한 자신감 예수께 충성하겠다는 의지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심.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자기 의에서 나왔음을 그는 보게 되었다. 그는 무너졌고 다시 세워졌다. 부활하신 예수는 그를 찾아오셨고 다시 불러주셨다. “내 양을 먹이라.” 무너짐을 통과한 자만이 진짜 사명이 시작된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겪는 침묵 무기력 피로는 어쩌면 하나님의 은혜다 그것은 신앙의 종말이 아니라 신앙의 전환이다 더 이상 이전처럼 기쁘지 않고 감동도 희미하고 기도가 막히는 그 순간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더 깊이 다가오신 증거다. 하나님은 무너뜨리심으로 일하신다 구조를 부수고 자아를 흔들고 안정감을 뿌리째 흔드신다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분은 이전에 알던 하나님이 아니다. 그분은 훨씬 더 크고 더 깊고 더 실제적인 하나님이다. 머리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눈물 속에서 만져지는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기꺼이 무너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너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 무너짐을 은혜로 받아들일 믿음이 있는가? 내 안의 질서가 깨지고 내가 붙들던 확신이 해체되고 내가 지키던 경건이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 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있는가? 무너짐은 수치가 아니다 복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위한 무너짐의 상징이다. 그분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으며 조롱과 침뱉음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무너짐 속에 구원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구속은 그분의 무너짐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너져야 한다. 하나님 없이 세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남게 되는 그 자리까지 거기서부터 진짜 신앙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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