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행으로 드러나는 진짜 믿음의 자리
기도가 계속되는데 왜 평안은 사라지는가
기도를 드리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사람들 중에도, 이상하리만치 깊은 결핍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말씀을 묵상하고 예배의 자리를 지키며, 삶 속에서 주님을 의식하려 애쓰고 있는 신자들인데도, 어느 순간 마음속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막힘이 자라고 있고, 그 막힘이 고요한 낙담으로 굳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기도의 자리가 버거워진다. 그들은 주님을 향해 여전히 말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익숙한 신앙 언어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의심한다.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기도가 부족한 걸까. 그러나 문제는 종교적인 노력의 부족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깊은 영역, 곧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마음이 하나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있다.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를 말하는 행위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분의 뜻에 내 뜻을 조율해가는 과정이며, 내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는 실제적인 동행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도는 점점 무거워지고, 말씀은 선명하지만 삶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그 말씀이 마음에 와닿지 않게 되고, 결국 신앙의 깊이는 자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점점 고립되고 지쳐간다. 그런 상태에서 드려지는 기도는 더 이상 관계를 증명하는 시간이 아니라, 내 안의 고립감을 감추기 위한 형식이 될 수 있다. 기도하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질서는 점점 무너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 기도의 중심에서 하나님과의 마음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강한 신호일 수 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존재의 가까움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다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다. 우리가 불러야만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도 아니고, 기도의 양이 채워져야 움직이시는 분도 아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의 모든 길에 함께하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먼저 앞서 가시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거리감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면, 그건 동행이 아니라 병행이며, 결국은 어긋남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거리보다 방향을 확인하는 시간이어야 하며, 그 방향이 다르다면 기도의 말수가 많아질수록 내면은 더 복잡해진다. 기도가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외면할 수 없는 피로감이 누적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피곤한 하루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일치되지 않은 채 길을 함께 걷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곧 주님의 뜻을 따라간다는 의미이고, 나의 계획과 속도, 감정과 바람을 잠시 멈추고 그분의 시선과 발걸음에 맞춰 살아가겠다는 내면의 복종이다. 그 복종이 없이 드리는 기도는 결국 나를 위한 설득이며, 하나님을 내 계획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설계가 된다. 아무리 성실하고 열심히 기도하더라도, 그 중심에 나의 뜻이 있다면 하나님과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게 되고, 그 거리감은 곧 기도의 무력감으로 드러난다. 기도란 하나님께 다가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자리이고, 하나님께서 이미 나와 함께 걷고 계신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며 그분의 걸음에 내 보폭을 일치시키는 실제적인 연습이다. 그러나 그 연습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습관적 기도의 반복 안에서 하나님의 살아 있는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신앙의 중심을 놓치게 된다.
마음이 하나 되지 않은 기도는 결국 독백이 된다
기도를 오래 해도, 그 기도가 주님의 마음과 어긋나 있다면 결국 나 자신을 향한 독백이 된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 뜻을 스스로에게 반복하며 확신을 주려는 감정적 위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보다 내 감정을 더 크게 듣게 되고, 그 감정이 점점 진리를 가리게 되면서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체되고, 기도는 더 이상 생명의 호흡이 아니라 종교적 행위가 된다. 그때부터 기도는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치게 한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부르고 있지만, 그분의 뜻에 아무것도 반응하지 않을 때, 기도는 길을 잃고, 나의 신앙도 그 길에서 멀어진다.
기도는 응답을 끌어내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 내면의 항복이며, 그 항복은 곧 내 뜻이 꺾이는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뜻을 따라간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내 계산과 내 시나리오에 따라 기도하고, 주님이 응답하시길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아직 하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음성을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분은 침묵하지 않으시고 멀어지지 않으신다. 우리가 듣지 않을 뿐이고,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진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향해 마음이 꺾이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기도의 분량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기도의 언어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중요하다. 내가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보다 지금 이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마음이 만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동행이란 같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같은 뜻으로 걷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있다는 말은 곧 주님의 시선과 걸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어야 하고, 그 공유가 없으면 기도는 결국 혼자 걷는 길로 남는다. 그러나 기도 속에서 그분과 마음이 일치되기 시작하면, 말이 줄어들고 감정이 잠잠해지며, 그 고요한 응답 속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진다. 그때부터 기도는 방향이 되고, 방향은 길이 된다. 주님과 마음이 하나된 사람만이, 기도하는 그 자리에서 진짜 평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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