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믿음이 만드는 하나님의 응답

인생의 짐을 홀로 지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 없다고 믿기에, 묵묵히, 때로는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여정에서 혼자가 아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주 앞에 내려놓고, 그 자리에 믿음을 올려놓는 사람이다.

성경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미 받은 듯 살아가는 것. 그 삶을 성경은 선진들의 증거라고 말한다. 이 믿음이야말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의 시작이다.

현대 사회 속에서도, 신자는 기도한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단순하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려지는 기도에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절박한 기도라도, 그것이 불신과 염려 위에 세워졌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불안을 되뇌인 것일 뿐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여기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감정의 안정이 아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이의 심령 속에 직접 임재하시는 성령의 통치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린 자는, 기도 중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기도 후에 마음에 오는 평강으로 하나님이 들으셨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응답의 신호다.

기도는 부드러운 간구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단호한 대적이기도 하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말했다. “너는 칼과 창으로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 이름으로 간다.”(삼상 17:45) 이것은 고백이자 선포이며, 싸움이었다. 믿음은 침묵의 종교가 아니다. 믿음은 불안과 절망, 마귀의 속삭임을 뚫고 나아가는 영적 선포의 행위다.

그래서 기도란 단지 속삭임이 아니다. 때론 명령이고, 선포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의지의 표현이다.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선언한다. 기도는 수동적 기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능동적 전진이다.

또한, 믿음은 기도하고 난 다음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기도 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께 맡겨놓고, 다시 돌아서며 마음속에 그 짐을 재배치하는 것은 믿음의 결핍에서 오는 반응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입술로 고백한다. “나는 맡겼다.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다.” 이 고백은 공허한 주문이 아니다. 실제의 역사를 전제로 한 선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즉, 믿음은 받기 전에 받은 자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기도는 시작일 뿐, 그 기도 후의 삶이 받은 자처럼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 믿음 위에 응답하신다.

믿음을 방해하는 가장 흔한 요소는 의심이다. 의심은 단순한 회의가 아니다. 성경은 의심을 “마귀의 무기”라고 말한다. 하와가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는 순간, 죄가 시작되었다. 의심은 하나님이 아닌 마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들어온다. 그리고 기도의 효력을 무력화시킨다. “의심하는 자는…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는 길에는 감사와 찬양이 필수다. 그것은 단지 예의가 아니라, 믿음의 실천 방식이다. 루스 벨 그레이엄 여사는 어느 날 아들에 대한 불안이 마음을 짓누를 때, 감사를 시작하며 마음의 빛을 회복했다고 고백했다. “감사가 불을 켰고, 두려움은 도망쳤다.” 믿음의 언어는 감사이며, 불신의 언어는 불평이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시고 일하신다. 의심하지 않고 기도한 사람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미 받은 자처럼 걷기 시작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믿음이란 단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결단을 동반한 선택이며, 순종을 통해 드러나는 실제이다. 성경은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정의하지만, 바람으로 머무르는 신앙은 결코 역사를 낳지 않는다. 실상이란 현실이 된다. 현실이 되기 위해선 행동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믿음은 행위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기도는 믿음의 입구다. 그러나 진짜 믿음은 기도 이후에 시작된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다. 이 평안은 심리적 안정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통치이며,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 상황에서 염려를 내려놓고 행동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주어진다.

성경 속 인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모두 어떤 음성을 들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들은 음성에 순종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떠났고, 노아는 비가 오기 전 방주를 지었다. 그들이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 음성에 순종한 실천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음성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는다. 듣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다.

믿음의 실상은 언제나 ‘평안’으로 확인된다. 불안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믿음에도 떨림은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떨림 속에서도 하나님께 맡기고 다시 걸어 나가는 것이다. 기도 중에 오는 평안은 하나님의 응답이며, 그것이 삶 속에서 지속되기 위해선 기도 이후의 ‘삶’이 하나님께 맡겨져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겠다고 하셨다. 단, 우리가 먼저 내려놓을 때만 가능하다. 시편 68편 19절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찬양한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맡겼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내려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입으로는 주께 맡긴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계획과 염려를 쥐고 살아간다. 믿음이란 그것을 내려놓는 용기이자, 하나님의 방식에 삶을 위탁하는 겸손이다.

기도는 단지 구하는 것만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싸움이요, 선포이며, 대적이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칼을 들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고 나갔고, 그 이름으로 승리했다. 오늘의 신자에게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믿음의 사람은 상황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다. 그는 말씀으로 싸우고, 진리로 저항하며, 약속으로 선언한다. 기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역을 삶 속에 선포하는 통로다.

마태복음 6장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매일 그 염려들 속에 놓여 있다. 여기서 믿음은 단지 “염려하지 않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우선하는 선택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우선순위를 묻고 계신다. 믿음의 사람은 그 질문 앞에서 자신이 붙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붙든다. 그리고 그 자리에 채움의 기적이 일어난다.

믿음이란 ‘이미 받은 줄로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마가복음 11장 24절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한다. 이는 단순한 낙관주의나 정신승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의 기준이 되는 믿음의 시스템이다. 우리는 현실보다 진리를 기준으로 삼는 삶을 택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이며, 그 위에 모든 응답이 세워진다.

믿음을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언제나 ‘의심’이다. 성경은 이 의심을 단순한 불신이 아니라, 마귀의 전략이라 경고한다. 하와는 단지 호기심에서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 그는 의심했기 때문에 죄에 빠졌다. 하나님은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고, 마귀는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다른 해석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경험을 더 신뢰한다. 그렇게 의심이 자리를 잡고, 믿음은 흔들린다.

이때 필요한 것이 ‘감사’다. 감사는 믿음을 다시 일으키는 영적 언어다. 루스 벨 그레이엄 여사는 두려움에 휩싸인 한밤중, 감사로 기도의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그 순간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고백했다. 감사는 단지 예의가 아니라, 믿음의 영적 전략이다. 불안이 몰려올 때 우리는 감사로 저항할 수 있다. 찰스 스펄전은 말했다. “축복에 감사하면 축복이 연장되고, 불행에 감사하면 불행이 끝난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구원을 보이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식이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종종 마음속의 원한과 미움이다. 사람에 대한 용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 마가복음 11장 25절은 “기도할 때에 누구에게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관계의 회복 없이는 응답을 주시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감정적 해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정의보다 사랑을, 판단보다 용서를 먼저 요구하신다. 교회는 이 세상과 다르다. 세상은 옳고 그름으로 나누지만, 교회는 회복과 용서로 이어져야 한다.

믿음은 결국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분이 상 주시는 분이며, 나를 돌보시는 분임을 신뢰할 때, 비로소 그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 된다. 로마서 8장 32절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십자가는 그 증거다. 십자가는 단지 구원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근거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실제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다시 고백하게 된다.

“내가 믿음으로 사는 이유는, 내 짐을 대신 진 분이 있기 때문이다.”

매일말씀저널 |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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