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속되고, 믿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품은 순간부터, 많은 여성이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 호칭은 어쩌면 인생의 가장 큰 사랑과 동시에 가장 거대한 부담을 함께 안겨주는 이름이다. “아이는 축복입니다.” 수많은 말들 속에서 축복은 신앙의 언어로 굳어졌고, 그 믿음 위에 엄마들은 묵묵히 일상을 버텨왔다. 그러나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랑하는데 왜 이렇게 지칠까.” 믿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삶은 왜 이렇게 무너지는 걸까.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지만,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교회 안에서도, 공동체 안에서도.
육아는 물리적인 노동을 넘어 정체성의 구조를 뒤흔드는 일이다. 아이가 중심이 되고, 남편이 중심이 되고, 가족이 중심이 되다 보면, 결국 자신은 모든 중심에서 멀어진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그렇게 설명될수록, 나는 나를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내 이름은 점점 흐려지고, 내 감정은 점점 낡아진다. 기도하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말,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말,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해야 한다는 말. 그것은 이상적인 문장일 수 있지만, 현실은 종종 그 반대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기도가 되지 않는 날, 말씀은 보이지 않고, 감사는 입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죄책감이 쌓인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닐까. 믿음이 연약한 탓은 아닐까.
그러나 진짜 문제는 신앙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삶이 너무 버겁기 때문이다. 감당해야 할 일상과 감춰야 할 감정들이 신앙을 짓누른다. 그럴수록 교회는 더 침묵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아시니까.” “기도하면 길이 열릴 거예요.” 익숙한 말들 속에서 위로는 실종된다. 위로라는 이름의 충고들이 진심 없는 신앙의 언어로 소비될 때, 진짜 감정은 숨는다. 고백은 멈추고, 신앙은 조용히 말라간다. 많은 엄마들이 믿음을 버린 것이 아니라, 믿음을 말할 공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이를 안고 예배에 서 있지만, 마음은 멀다. 말씀을 들으며 앉아 있지만, 눈물은 말라 있다.
이 믿음의 무게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신앙이 약한 것이 아니라, 감정이 정직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사랑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감정을 신앙의 실패로 해석해 버린다.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하나님은 날 멀리하시는 걸까.” 그렇게 감정은 자기비난으로 뒤엉켜 신앙을 향한 걸음을 더디게 만든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은 언제나 무너진 자리에서 일하셨다. 예수는 회당보다 거리에서, 종교지도자보다 눈물 흘리는 여인과 더 오래 머물렀다. 그분이 관심 두신 대상은 언제나 ‘완벽한 신자’가 아니라 ‘넘어진 사람’이었다.
지금 이 시대의 많은 엄마들은 넘어진 채 걸어가고 있다. 사랑하지만 매일 지치고, 믿고 있지만 자주 흔들린다. 그것은 위선이 아니다. 신앙이 구체적인 현실 위에서 작동한다는 증거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신다. “네가 왜 그렇게 무너졌니?”라고 묻지 않으시고, “지금 거기 있니?”라고 부르시는 분. 그 음성은 여전히 작고 낮지만, 정직한 고백 위에 서 있다면 분명히 들린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새벽마다 분유를 타며 기도보다 수면을 원했고, 예배 시간에도 아이 뒷모습을 쫓느라 말씀은 반쯤 흘렸고, 주일조차 ‘엄마’로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 그런 삶은 단지 바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고립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기다리신다. 무너진 감정을 꾸미지 않아도 되고, 흔들리는 믿음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자리. 그게 복음이다. 믿음이 강할 때만이 아니라, 믿음이 흐려진 지금도 여전히 당신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라는 진실. 그것이 이 글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무너졌다는 고백이, 회복의 시작이 된다면”
‘엄마’라는 이름은 때때로 정체성이 아니라 역할로만 소비된다. 그 안에 감정이 있고, 믿음이 있고, 무너짐이 있다는 사실은 종종 잊힌다. 사회는 이상적인 엄마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제시한다. 늘 밝고, 인내하며, 아이에게는 다정하고, 남편에게는 지혜롭고, 스스로는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 하지만 그 이미지는 현실의 여성들에게 과도한 짐이 된다. 교회 역시 여기에 자유롭지 않다. 기도하는 엄마, 새벽에 일어나는 아내, 주일을 지키는 가정. 아름다운 본보기로서의 이상은 곧 지켜야 할 ‘신앙의 기준’이 되었고,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엄마들은 스스로를 신앙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라 여기게 된다.
이러한 실패감은 단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신앙적 존재감의 붕괴로 이어진다. 성경공부 모임에 가지 못하는 것, 아이 때문에 주일예배를 온라인으로만 드리는 것, 교회행사에 빠지는 것 등이 반복될수록 “나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그리고 그 거리감은 하나님과의 거리로 확장된다. 하지만 이 감정은 현실의 압박과 구조적 침묵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일 뿐, 신앙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라졌는가’가 아니라, ‘신앙을 표현할 언어가 사라졌는가’이다.
교회는 많은 경우 정답을 가르치지만, 질문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믿음으로 이기라고 말하면서, 무너지는 이유는 묻지 않는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라는 요청은 많지만, 고백할 수 있는 신자는 드물다. 그래서 많은 엄마들이 ‘말하지 못하는 믿음’으로 버틴다. 침묵은 지혜가 아니라 고립이고, 겸손이 아니라 두려움일 수 있다. 신앙이란 고백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을 말할 수 있는 자리’다.
성경은 무너짐을 실패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끊임없이 무너진 자들의 이름을 부르셨다.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 있느냐’, ‘다윗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야, 네가 나를 따르겠느냐.’ 이 질문들은 어떤 신학적 정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존재 자체를 다시 일으키는 부르심이었다. 우리가 진심으로 기억해야 할 복음의 출발점은 여기다. 무너졌다는 고백이 회복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은 고백 위에 다시 관계를 세우시는 분이다.
현실은 신앙의 감정을 지우려 한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삶은 너무 반복적이고, 예상 불가능하며, 감정 소모가 크다. 하지만 그 삶 안에 하나님의 시선은 여전히 머물러 있다. 기도하지 못한 날에도, 말씀을 놓친 주간에도, 하나님은 먼저 멀어지지 않으신다. 오히려 묻고 계신다. “지금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꾸짖음이 아니라 초대다. 감추지 말고 그 자리에 서라는 초대, 완벽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진실이다.
신앙은 강함의 언어가 아니다. 진짜 믿음은 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자란다. “나는 지쳤다”, “나는 흔들린다”, “나는 잘 모르겠다”는 고백이야말로 믿음의 토양이 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가 있다면, 당신이 바로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께 붙들릴 수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사랑하지만 지친 마음도, 믿지만 흔들리는 감정도 하나님은 모두 아신다. 그리고 그 무게를 나 혼자 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더 이상 강한 척하지 않아도 된다. 지치면 앉고, 흔들리면 말하고, 무너지면 울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신앙의 자리다. 하나님은 오늘도 무너진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삶 안에 함께 머무시며 기다리신다. 회복은 강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회복은 정직한 고백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믿음은 완벽한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당신처럼 불완전한 사람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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