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당 안에서 봉사하고, 교회 모임을 돕고, 리더로서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매주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회의 시간에 의견을 내고, 누군가의 신앙을 돌아본다. 그러나 그들 안에도 말할 수 없는 고요한 피로가 쌓여간다. 예배는 의무가 되었고, 기도는 보고용이 되었다. 자리를 비우면 허전함보다 책임감이 먼저 떠오른다. 열심은 남아 있는데, 기쁨은 흐릿하다. 섬긴다는 말이 언젠가부터는 무거운 구속처럼 다가온다. 사역은 그대로인데, 마음은 점점 멀어진다.
교회는 흔히 열심히 섬기는 이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예배 전 세팅, 주중 기도 모임, 성도 심방과 안내, 주일학교 교사와 청년부 리더까지 이들의 손길 없이는 많은 일이 멈춘다. 그래서 이들은 좀처럼 멈추지 못한다. 누구에게도 약해졌다는 말을 꺼낼 수 없고, ‘지친다’는 말은 무책임하게 들릴까봐 속으로 삼킨다. 그들은 교회의 기둥처럼 서 있지만, 속에서는 신앙의 중심이 무너져가고 있다. 말씀은 반복되고, 찬송은 입술만 움직인다. 기도는 고백이 아니라 할당량이 되었다. 감동 없이 움직이는 예배의 바깥에서, 그들은 조용히 무너진다.
하나님은 사람의 열심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말씀은 순종을 명하지만, 그 순종이 의무감으로 굳어질 때, 신앙은 생명을 잃는다. 문제는 그 사실을 알아도 놓지 못하는 데 있다. 예배당에서 마주치는 눈빛, “수고 많으셨어요”라는 말, “없으면 안 되는 분”이라는 칭찬이, 때론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사슬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없어지면 사역이 무너질까 두려워하며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정작 무너져가고 있는 건 그들의 내면이다. 주님의 일을 감당하다가, 정작 주님과 멀어지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성경은 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알고도, 실제 삶에서는 사람의 기대를 의식하며 살아간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함께 사역하는 동료들의 시선, 기대하는 성도들의 말, 리더로서 감당해야 할 무게는 때로 하나님의 시선보다 더 무겁게 다가온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지만, 어느 순간 그 섬김이 사람의 평가와 반응에 기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신앙은 내적인 자유를 잃고, 외적인 의무감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믿음은 때로, 조용히 중심을 재정비하는 용기를 요구한다. 모든 일을 계속 감당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먼저 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사역의 현장에서 “나는 지금 누구를 기쁘게 하려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날마다 던져야 한다. 칭찬이나 인정이 없어도 자리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참된 경건의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대부분은 외롭고, 눈에 띄지 않으며, 이해받기 어렵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의 시선은 머문다.
예배의 자리도 마찬가지다. 찬양 인도를 맡든, 아이들을 가르치든, 안내를 하든—그 모든 사역의 중심은 결국 하나님 앞에 머무는 자세다. 아무것도 맡지 않았더라도, 예배당 한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그 이들이야말로 진짜 자리를 지키는 이들일 수 있다. 외적인 사역보다 내면의 자리를 더 소중히 여기는 이들, 책임보다 은혜를 먼저 구하는 이들, 하나님을 향한 첫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 매일 싸우는 이들이 교회를 지탱하고 있다.
이 시대 교회는 자리를 비우는 사람보다, 자리를 지키는 사람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한다. 사역이 많다고 충성된 것이 아니고, 조용히 기도하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복음의 토대를 만드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가장 깊은 위로와 회복을 허락하신다. 결국 복음은, 일을 많이 한 사람보다 자리를 끝까지 지킨 사람 안에 열매를 맺는다.
누군가는 사역을 쉬어야 한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낀다. 몇 주간 예배 참석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괜히 눈치가 보이고, 리더십 안에서 ‘공백’이라는 말을 듣게 될까 두렵다. 그렇게 우리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계속 교회에 머문다. 그러나 진짜 무게는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잃은 채 남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열심’을 멈추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하지만 방향 없이 흘러가는 열심은 언젠가 신앙을 소진시킨다. 중심이 흔들리는 신앙은 외적으로는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점점 안으로는 무너진다.
신앙의 ‘자리’를 지키는 일은 단지 예배당에 출석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머무는 태도, 그리고 내 중심에 여전히 하나님이 계신지를 확인하는 결단이다. 사역은 잠시 멈출 수 있어도, 이 자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다. 우리는 사역은 계속하면서, 이 자리를 잃어버리기 쉽다. 기도는 기획이 되고, 말씀 묵상은 설교 준비가 되고, 예배는 반복되는 리듬이 된다. 그렇게 중심이 빠진 활동만 남고, 정작 하나님과 나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게 된다.
그럴 때 신자는 불편해진다. 여전히 주일엔 교회에 있고, 회의와 행사를 준비하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지만, 혼자 남은 순간 공허함이 밀려온다. ‘나는 지금 왜 이 자리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머리를 스치고,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다시 다음 주를 준비한다. 그 불편함은 은혜가 끝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라고 하시는 신호일 수 있다. 처음 신앙을 가졌던 자리, 말씀 한 구절에도 눈물이 나고, 찬송 한 곡에 마음이 움직였던 그 자리.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신다.
자리를 지키는 믿음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하다’, ‘무난하다’, ‘감정이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는 늘 조용히 자리를 지킨 사람들을 주목하셨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 무리 속에서 옷자락만 만졌던 여인, 바리새인 앞에서도 한 마디 없이 고개를 숙였던 세리, 이들은 다 말 없이 자리를 지킨 사람들이었다. 말보다 중심을, 활동보다 신앙의 방향을 중요하게 여긴 이들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런 이들을 통해 믿음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적 성과보다 중심을 원하신다. 중심이 흐려졌을 때는 오히려 사역을 멈추고 기도부터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멈추는 것에 실패의 이미지를 붙이고, 쉬는 것에 게으름의 꼬리표를 단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무너진 상태로 계속 일하고, 마음이 죽은 채로도 리더로 남는다. 이것은 공동체에도 위험한 일이다. 중심이 무너진 사역자와 리더는 결국 다른 이들의 신앙에도 영향을 끼친다. 자신은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복음은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 중심이 살아 있지 않다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결국 메말라버린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멈춤이다. 단절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멈춤. 하나님은 일의 성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가를 보신다. 감정이 사라지고 감동이 없을 때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자, 하나님 앞에 있는 자를 하나님은 다시 일으키신다. 예배당에 앉아 있는 그 자리는 단순한 출석의 자리가 아니라, 회복의 자리이고, 은혜의 시작점이다.
교회는 사역자를 양산하는 곳이 아니라 예배자를 세우는 곳이어야 한다. 예배자는 먼저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고,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회복된 사람이다. 그들이 사역자가 될 때, 비로소 건강한 교회가 세워진다. 사역이 지치고, 자리가 무거울 때, 가장 먼저 돌아봐야 할 것은 내 중심이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지금 내 안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가. 그 질문이 사라졌다면, 아무리 바쁘고 충실해 보여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자리를 지키는 것이 힘든 이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안다.” 그 말은 위로이자, 다시 일으키는 초대다. 자리를 떠나지 않은 이들, 그 자리를 다시 찾은 이들, 그들에게 하나님은 복음을 새롭게 하신다. 감정이 없어도, 눈물이 없어도, 다시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면 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하나님은 그렇게 다시 우리를 쓰신다. 그 자리에 다시 머물 때, 복음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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