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시는가

 

누구나 꺼내기 싫은 과거 하나쯤은 안고 산다. 어떤 건 남에게 들킬까 두려운 죄의 기억이고, 어떤 건 누군가에게 받았던 깊은 상처다. 잊힌 줄 알았던 일이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오래전 말 한마디가 다시 가슴을 후벼 판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다 지나간 일이라고. 누구나 실수한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기억을 지우지 못한다. 지워지지 않은 과거는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어떤 이들에겐 그게 신앙의 발목을 잡는 짐이 된다.

기도할 때마다 고개를 못 드는 사람들,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선 “나는 자격이 없다”고 중얼거리는 사람들. 자신이 저질렀던 일, 혹은 겪었던 일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에게만큼은 예외로 느끼는 이들이 있다. 죄는 이미 용서받았다고 해도, 그 기억은 여전히 날 판단하고 있다.

성경은 그런 과거를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단지 죄를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반응을 기다리셨다. 그분은 죄에 즉시 개입하시기보다, 그 죄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다뤄지는지를 보신다. 이 기다림의 시간은 심판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회개의 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함이 아니라, 죄 이후에 어떻게 응답하느냐가 하나님의 관심이었다.

아브라함의 거짓말, 모세의 살인, 다윗의 간음과 살인 교사, 요나의 도망. 이들의 삶에는 분명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과거를 숨기거나 삭제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안에 개입하셔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신다. 죄의 흔적이 은혜의 배경이 되는 방식이다.

가인 이야기를 보자. 살인을 저지른 뒤 방황하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징벌만을 내리지 않으셨다. 동시에 ‘표’를 주어 그를 보호하셨다. 단죄에 그치지 않고, 무너지지 않게 붙드신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은 심판보다 더 깊은 자비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이후에도 과거를 잊지 않았다. 하나님 역시 “너희도 이방인이었음을 기억하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그 기억은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상기시키는 기초가 되었다. 하나님은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사용해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회개의 고백을 통해 시편이라는 유산을 남겼고, 그의 진실한 통회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앙인의 심장을 울린다. 하나님은 그의 과거를 지우지 않으셨지만, 그를 다시 쓰셨다. 기억은 남되, 그 의미는 달라진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보다 인간이 자기 과거에 더 가혹하다는 데 있다. 하나님이 잊으셨다고 해도, 자신은 잊지 못한다. 그래서 기쁨은 없고, 죄책감만 남는다. 복음을 안다고 하지만, 그것이 자기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느낌. 하나님은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는데, 본인은 여전히 어제의 자신을 현재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죄를 ‘잊는다’는 표현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다. 의도적이고 능동적인 결단이다. 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더 이상 관계의 기준으로 삼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모른 척하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우리를 단정짓지도 않으신다.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과거를 심판의 증거가 아닌, 은혜의 문으로 바꾸신다.

과거를 지우려 애쓰기보다, 하나님께 내놓는 것이 먼저다. 숨기고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드러낼 때, 치유가 시작된다. 회개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과거에 개입하시도록 허용하는 신앙의 열림이다.

세상은 사람을 ‘그때 그 사람’으로 기억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내 자녀’로 부르신다. 세상은 실패의 기록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회개의 순간부터 새 일을 시작하신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기억이 더 이상 나를 규정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그 안에서 일하신다. 그분의 방식은 단순한 삭제가 아니라 의미의 전환이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통해, 구원의 이야기 하나가 더 써진다.

누군가는 과거를 덮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그 기억에 발목 잡혀 현재도 감옥처럼 산다. 어느 쪽이든, 해결되지 않은 과거는 사람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린다. 문제는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신앙 안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기도하고 회개했는데도, 때때로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잘 지내다가도 문득 예전의 일이 떠올라 멈춰버린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자주 과거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셨다. 그들의 과거를 묻지 않으셨다기보다, 그 과거 위에 새로운 정체성을 덧씌우셨다. 한 예로,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낮 12시에 물을 길으러 왔다.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는 과거에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었다. 예수는 그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그를 정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삶의 진실을 꺼낸 뒤, 그 안에 들어가셔서 새로운 목마름, 새로운 갈증에 대해 말씀하셨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요한복음 4:14)

예수님은 과거를 드러내되 그것으로 사람을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서 새로운 갈증을 일으키고, 전혀 다른 생명을 열어 보이신다. 죄의 기억을 꺼내는 이유는 정죄가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도 그랬다. 그는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다. 스데반의 죽음에 동의했고, 수많은 성도를 체포하러 다녔다. 그런 그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바울은 그 과거를 부끄럽게 여겼지만,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편지 곳곳에서 자기 과거를 꺼내며,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임을 분명히 했다.

과거는 기억되지만, 더 이상 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 매이지 않았고, 하나님이 그 기억을 사용하심을 믿었다. 하나님은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 그 위에 새로운 정체성을 덧입히신다. 회개와 믿음이 진짜라면, 더 이상 그 사람은 ‘그때 그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선언하신다.

기억은 단지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에 영향을 준다. 인간의 뇌는 충격적인 경험일수록 더 선명하게 기억하도록 설계돼 있다. 심리학자들은 ‘트라우마 기억’이 일반 기억보다 더 깊게 각인된다고 말한다 특히 죄책감과 수치심은 뇌의 편도체와 해마에 오래 남아,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현재의 자아 인식까지 뒤흔들 수 있다.

이런 신경학적 특성은 복음이 단순한 말이 아니라 ‘사건’으로 심겨져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성경이 말하는 ‘마음에 새긴다’는 표현은, 그 깊이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기억이 진리의 기준은 아니다. 내가 내 죄를 기억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걸 기준 삼아 나를 평가하시는 건 아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그 기억에 권위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미 끝내셨는데, 나는 아직 붙잡고 있다. 그 기억이 나를 설명한다고 믿고, 그 경험이 내 미래를 제한한다고 여긴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복음은 ‘정보’가 되고, 삶은 여전히 어둠에 갇힌다.

복음은 과거를 덮는 게 아니다. 정면으로 마주보게 한다. 하나님 앞에 꺼내놓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그리고 더 이상 그 죄의 정체성으로 자신을 부르지 않는 연습을 시작하는 것. 죄인으로 살던 내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이름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게 믿음이다.

때때로 성경은 말한다. “잊으라.” 그러나 더 자주 성경은 말한다. “기억하라.”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하라, 너희가 누구였는지 기억하라. 하지만 그 기억은 죄책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과거가 나를 깎아내리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건져내신 사실을 더 깊이 붙잡는 계기가 되는 것. 그게 복음의 메커니즘이다.

과거가 없어지는 것이 회복이 아니다. 그 기억이 내 안에 남아 있지만, 더 이상 나를 휘두르지 못할 때. 더 이상 그 기억이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더 선명히 드러내는 통로가 될 때. 그때 우리는 진짜 자유를 누리기 시작한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기억 속에서 정체성을 만든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이름에서 새 정체성을 찾으라고 말한다.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닌, 지금의 나. 더 이상 어둠 속에 머물던 내가 아닌, 빛 가운데 걸어가는 나.

하나님은 과거를 지우시지 않는다. 그보다 더 놀라운 방식으로 일하신다. 그 과거 위에 은혜를 새기고, 수치 위에 자비를 덧입히신다. 과거는 그대로인데, 의미는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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