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은 언제부턴가 오해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신앙의 열매였던 헌금이 교회에 대한 비판의 소재로 등장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여주는 외식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헌금은 믿음의 훈련으로 자리 잡아 왔고, 신앙인의 삶 가운데 자연스러운 순종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왜 헌금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더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다. 헌금은 단지 종교적 의무인가, 아니면 살아 있는 믿음의 증거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돈을 드리는 방식이나 액수를 논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누구로 믿고 있는가, 그분과의 관계가 어떤 상태인가를 드러내는 깊은 내면의 물음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소유를 추구한다. 애써 얻은 것, 내 노력의 결과로 쥐고 있는 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 삶을 건다. 돈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의지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현실의 기호다. 이 돈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행위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하나님이 돈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지를 그 헌금을 통해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원하신다. 그러나 그 마음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마음이 드려졌다고 말하면서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갑을 통해 마음을 확인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이 있는 자는 지갑도 반드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초대교회는 헌금을 명령이 아닌 기쁨으로 여겼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정한 대로’는 단순히 인간적 결심을 말하지 않는다. 성령의 감동과 믿음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내적 고백이다. 과부의 두 렙돈은 액수가 아니라 본질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드린 액수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녀의 전부를 보셨다. 가진 것 중에 일부를 드린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께 의탁한 믿음이 담긴 것이었다. 헌금이 믿음인 이유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실제로 신뢰하고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구체적인 순종으로 드러난다. 말로는 얼마든지 경건할 수 있지만, 드림은 말보다 더 정직한 증언이다.
헌금은 믿음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헌금에는 삶의 태도, 가치의 중심, 하나님에 대한 이해, 영적 성숙의 정도가 그대로 나타난다. 많이 드린다고 믿음이 크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믿음이 큰 사람은 반드시 드린다. 헌금은 훈련이며 동시에 드러남이다. 은밀히 훈련되는 동안, 우리의 물질관과 하나님관은 정결하게 정돈된다. 또한 그 과정 속에서 헌금은 단지 돈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내 삶 전체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신앙의 고백이 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붙들려 있다는 표시다. 내 손을 열 수 있다는 것은 내 마음이 이미 열려 있다는 증거다. 그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헌금을 의무로 받아들인다. 당연히 해야 할 신자의 책무처럼 여긴다. 물론 공동체의 필요와 교회의 사역을 위한 헌금의 실질적 기능은 중요하다. 그러나 헌금이 단지 공동체 유지의 수단이 된다면, 그것은 복음의 원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발적인 순종을 기뻐하신다. 억지로 드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아니다. 마음 없이 드리는 헌금은 형식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깊이도 남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진 것 중 얼마를 가져가려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 전체를 하나님 앞에 두고자 하신다. 헌금은 그러한 전인격적 복종의 한 자락이며, 하나님 나라를 향한 동참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헌금을 힘들어하는가. 드림이 부담이 되는 이유는 마음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랑이면 헌금은 기쁨이 된다. 관계가 율법이 되면 헌금은 짐이 된다. 사랑은 억지로 하지 않는다.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드러난다. 헌금이 부담이 되고, 계산이 되고, 의무처럼 느껴질 때는 우리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잊었기 때문에 드림이 무거워진 것이다. 하나님은 전부를 주신 분이다. 가장 귀한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분이다. 그 앞에서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결국 내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다. 그러나 그 전부는 언제나 부분으로 표현된다. 헌금은 그 전부를 향한 부분의 응답이다.
믿음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추상적 신앙은 현실 앞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예배는 감정이 아니라 순종이고, 기도는 바람이 아니라 의지다. 헌금은 그 믿음이 얼마나 실제인지를 시험대에 올려놓는 자리다.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드릴 수 있다. 하나님이 나의 미래를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지금 손해 보는 것처럼 보여도 드릴 수 있다. 헌금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신뢰를 가장 직접적으로 시험하는 도구다. 누군가에게는 큰 결단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순종이다. 그 차이는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가의 차이다.
그러므로 헌금은 신앙의 지표다. 믿음 없는 자가 헌금을 드리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믿음 있는 자가 헌금을 외면하는 일도 드물다. 헌금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실제를 말해준다. 그것은 마음의 방향이며, 존재의 위치를 가리킨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은 은혜다. 내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 기적이다. 헌금은 하나님이 내 삶에 임재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며, 나는 내 전부를 주인 되신 하나님께 맡긴다는 고백이다. 그것이 헌금의 본질이다.
헌금이 의무가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아니다. 드림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다. 헌금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에 헌금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신자들의 삶 속에서 헌금은 일종의 습관이 되었고, 그 습관은 점점 의미를 잃어갔다. 반복은 경건을 만들기도 하지만, 반복은 형식을 만들기도 한다. 반복되는 헌금 속에서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잊는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헌금함에 넣는 것처럼 느껴지고, 공동체의 관행을 따르는 수준에서 헌금을 마무리한다. 헌금이 습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은혜에서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헌금은 언제든지 멈추고 만다.
성경은 헌금을 규정할 때 결코 양을 강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과부의 두 렙돈을 귀하게 여기셨다. 드린 금액이 아니라, 드린 중심을 보셨다. 그리고 그 중심은 그 사람의 삶 전체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이 점에서 헌금은 영성의 정체를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수단이다. 기도는 꾸밀 수 있고, 찬양은 외울 수 있지만, 헌금은 꾸밀 수 없다. 헌금은 지금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는가, 내가 진짜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그대로 드러낸다. 헌금은 결코 헌금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놓여 있다는 상징이자,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한 내적 싸움의 흔적이다. 헌금은 늘 마음과 싸워야 하고, 계산과 충돌하며, 현실과 긴장한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물질에 묶여 살아간다. 돈이 있어야 안심하고, 통장이 채워져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고, 재정이 여유로워야 사역과 헌신을 말할 수 있다. 헌금은 이 물질의 힘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꺾는 도구다. 돈이 내 삶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실제로 고백하는 시간이다. 드린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대는 것이다. 신앙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다. 그 믿음이 실제라면, 헌금은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과도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믿음을 요구하신다. 믿음이 없으면 드릴 수 없고, 드릴 수 없으면 믿음도 자라지 않는다.
헌금을 회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이다. 가진 것을 놓으면 채워지지 않을 것 같고, 지금의 부족함이 더 심각해질 것 같고, 내 인생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신뢰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채우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성이며, 약속이며, 신실하심이다. 다만 우리는 그 채우심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이란 결국 기다리는 용기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현재의 손해를 감수하고, 지금의 여유를 내려놓는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것보다 훨씬 더 큰 방식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신다. 헌금은 결국 그 믿음의 용기를 실천하는 자리다.
하지만 교회는 때때로 헌금을 강요해왔다. 감사의 헌신이 아니라 부담의 요청이 되었고, 성도의 결단이 아니라 시스템의 유지가 되어버렸다. 하나님은 그런 헌금을 원하지 않으신다. 억지로, 체면으로, 혹은 무기력하게 드려지는 헌금은 하나님께 아무런 향기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마음을 더 강팍하게 만들고,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 교회는 성도를 헌금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성도는 헌금으로 자기 의를 세워서는 안 된다. 헌금은 본질적으로 은혜에 대한 반응이며, 복음에 대한 응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안에서 실제가 되면, 나는 반드시 무언가를 드리고 싶어진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고, 전 인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국 헌신이라는 한 단어로 귀결된다.
헌금은 헌신의 가장 단순한 표현이다. 복잡한 논리가 아니라, 단순한 결단이다. 믿음은 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헌금은 그런 행동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고도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돈은 우리의 삶과 가장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 돈을 놓는다는 것은, 내 삶의 통제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가 된다. 헌금은 단지 ‘드림’이 아니라 ‘위탁’이다. 내 삶을 맡기며, 내 미래를 드리며, 나의 불안과 계산을 내려놓는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이다. 헌금은 그래서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된다. 그것은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고 싶어지는 은혜의 현장이다.
물질을 드리면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무엇을 먼저 드리느냐에 따라 무엇이 내 삶의 중심인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먼저 삼겠다는 뜻이고, 나의 왕좌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행위다. 세상은 늘 더 많이 가지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더 많이 나누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쌓아야 살아남는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흘려야 산다고 하신다. 헌금은 그 세상의 질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다. 믿음은 늘 현실을 역행한다. 그리고 그 역행의 끝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계심을 증명하신다. 헌금은 그 살아계심을 기대하며 걷는 걸음이다.
이제 교회는 다시 헌금을 가르쳐야 한다. 왜 드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해야 한다. 단순한 동기 부여가 아니라,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오는 감격이어야 한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함이어야 하고,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기쁘게 드리는 자를 찾으신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나님을 진짜 주인으로 믿는 믿음에서만 가능하다. 헌금은 결국 복음 앞에서의 반응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모든 것을 주셨기에, 나는 그분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고 싶어진다. 그것이 헌금이고, 그것이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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