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이다. 그리고 삶은 가장 현실적인 방식으로 신앙을 시험한다. 그 중에서도 재정은 신앙의 깊이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자리다. 많은 이들이 예배와 기도, 말씀 앞에서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재정의 문제 앞에서는 그 믿음을 흔들린다. 돈은 단지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두려움, 그리고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비추는 거울이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녀야 할 삶의 태도였다. 믿음은 하나님의 공급을 신뢰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계산이 아닌, 보이지 않는 손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다. 수입이 줄고, 잔고가 비어갈수록 사람은 본능적으로 불안해진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여전하지만, 삶의 깊은 곳에서는 불안이 머물고 염려가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재정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실제로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주는 시험대가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이끄셨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로 들이지 않으시고, 먼저 아무것도 없는 땅을 지나게 하셨다. 이유는 분명하다. 광야에서야 비로소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날마다 만나를 받아 먹었다. 그것은 일주일치도, 하루 이틀분도 아니었다. 딱 하루치였다. 그것이 재정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공급은 언제나 오늘의 필요에 맞춰 온다. 풍족함이 아니라, 의존함이 믿음을 자라게 한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의 은혜를 ‘쌓아둠’으로 오해한다. 재정이 여유 있을 때만이 아니라, 재정이 줄어들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믿음의 길이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재정이 무너질까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그 두려움은 삶의 방향을 바꾸고, 기도의 초점을 흐리며, 믿음의 태도를 왜곡시킨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서 여유를 거두신다. 그것은 벌이 아니라 훈련이다. 재정이 줄어드는 경험은 믿음을 더 깊이 뿌리내리게 만드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다. 신명기 8장 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알려 하셨다.” 그리고 이어진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셨다.” 광야에서의 결핍은 사람을 낮추기 위한 것이었고, 그 낮아진 마음에 말씀을 심기 위함이었다. 재정의 어려움은 단지 없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말씀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급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공급자 되심은 단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역할이 아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필요한 돈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기 위해 공급하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필요를 따라 채우시지만, 때로는 지체하심으로 사람을 다듬으신다. 하나님의 손길은 항상 즉각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역사하신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갔을 때, 하나님은 즉시 구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감옥에까지 이르게 하셨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창 39:2) 형통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다. 재정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형통이다.
우리는 필요가 채워질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결핍 속에서도 일하신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하나님의 공급은 눈에 보이는 계산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흐른다. 신앙은 그 약속을 붙잡는 일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언제나 기다림을 전제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 공급은 우리의 계획보다 더디게, 때로는 다르게, 그러나 반드시 온다.
믿음은 돈이 많을 때가 아니라, 돈이 없을 때 하나님을 놓지 않는 자리에서 자란다. 사람은 가진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살아간다. 신앙은 계산을 뛰어넘는 확신이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반드시 채우시는 분이다.
믿음이 남는 자리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급이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공급을 신뢰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진짜 믿음은 그 공급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까지 감당한다. 하나님이 채우시는 분이라면, 나는 맡은 자로 살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를 청지기라 부른다. 청지기는 소유자가 아니다. 청지기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신앙의 성숙은 단지 믿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재정은 단지 필요한 것을 채우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뜻을 따라 쓰이는가의 문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 뜻대로 되게 하소서”라고 말하지만, 재정 앞에서는 종종 그 뜻을 우리 방식으로 해석한다. 헌금을 드릴 때도, 선교를 후원할 때도, 어떤 사람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여유를 기준으로 정한다. 그러나 진정한 청지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드린다. 마가복음 12장의 과부는 두 렙돈을 드렸다. 그것은 액수로 보면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칭찬하셨다. 왜냐하면 그녀는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이다. 재정은 액수보다 중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돈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의 무게를 보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채우신다. 그러나 그 채움은 우리의 탐욕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필요를 따라 채우시고, 그 채움을 통해 믿음을 자라게 하신다. 그래서 재정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시험이다. 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통해, 우리의 중심이 드러난다. 부자 청년은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했지만, 재물을 팔아 나눠주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근심하며 돌아갔다. 예배와 기도는 드릴 수 있었지만, 재정 앞에서는 믿음이 드러나지 않았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재정의 축복을 구한다. 그러나 진정한 축복은 액수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삶, 그것이 복이다. 신자는 재정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다. 바울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고백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믿음은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중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족’에서 나온다.
염려는 재정의 문제가 아니다. 염려는 신뢰의 문제다. 가진 것이 적어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종종 ‘더하신다’는 약속에 머물고, ‘먼저 그의 나라’라는 요구는 흘려보낸다. 신앙은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필요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놓고, 계획보다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묻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인색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무엇이든지’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때로는 주시지 않는 것이 은혜이고, 지체하심이 사랑이다. 믿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공급의 즉시성보다, 공급하시는 분의 지혜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신다. 오늘도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며, 반드시 채우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채움이 언제 오는가가 아니라, 그 채움을 기다리는 나의 자세가 어떠한가이다. 재정이 줄어드는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다면, 이미 풍성한 은혜 속에 있는 것이다 신앙은 ‘갖는 삶’이 아니라, ‘맡긴 삶’이다. 내가 무엇을 쌓아두었는가보다, 하나님의 손에 무엇을 올려드렸는가가 중요하다. 재정의 문제는 단지 생활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의 가장 현실적인 증명이다. 믿음이 있다면, 재정은 도구가 되고, 삶은 통로가 된다. 하나님은 그 통로를 통해 자신의 나라를 흐르게 하신다.
그래서 재정은 늘 신앙의 무게를 측정하는 자리가 된다. 우리는 가진 것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으로 사는 존재다. 오늘도 그 신실하심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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