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기다림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분의 때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의 신앙은 빠름에 익숙해졌다. 속도는 이제 신앙의 능력처럼 여겨진다. 기도하면 곧 응답이 있어야 하고, 예배는 즉시 감동을 줘야 하며, 삶의 변화도 빠르게 일어나야 진짜 믿음이라고 여겨진다. 더디면 의심하고, 지체되면 포기한다. 기다림은 신앙의 실패로 간주되고, 그로 인해 신앙은 점점 얇아지고, 성장은 피상적으로 흐른다.
하나님은 시간을 따라 일하신다. 그분은 창조 때부터 모든 것을 시기로 정하시고, 때에 맞춰 일하시며, 때에 따라 사람을 다듬으신다. 그분은 인간의 속도에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어 가르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언제나 기다림이라는 과정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뜻은 기다림 없이 드러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람은 기다림 없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다릴 줄 모르면 하나님의 뜻을 구해도 그 뜻을 감당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에 머물 수 없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지만, 그 약속이 현실이 되기까지 이십오 년이 걸렸다. 그 기다림 속에서 그는 신뢰를 배워야 했고, 자신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을 분별하는 법을 익혀야 했다. 이삭은 약속의 성취였지만, 그보다 먼저 이루어진 것은 아브라함의 변화였다. 믿음은 약속이 이루어졌을 때가 아니라, 약속이 지체되는 시간에 하나님을 놓지 않는 데서 자라난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보냈다. 그는 애굽의 왕자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미디안의 무명한 목자로 낮추셨다. 말이 느리다는 이유로 사명을 피하려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임재만을 구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갔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그는 능력으로 사람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겠지만, 하나님은 그를 임재로 인도하는 사람으로 세우셨다. 기다림은 역할을 주는 시간이 아니라, 존재를 빚는 시간이다.
예수님조차 서른 해를 아무 기적 없이, 아무 말씀도 없이 기다리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아버지의 뜻이 시작되기 전까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기다림 안에서 자신을 지키셨고, 그 기다림 이후에야 공생애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기다림을 통과한다 말씀은 서둘러 성취되지 않고, 하나님은 응답을 지연시키면서 사람을 바꾸신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 기다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래 기도해도 변화가 없으면 낙심하고, 붙들던 말씀도 오래 지속되지 않으면 손을 놓는다. 조급한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듣기도 전에 결론을 내리고, 성령의 인도보다 환경의 변화를 먼저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점점 신앙은 얕아지고, 삶의 뿌리는 흔들리며, 감정만이 신앙의 증거처럼 부풀려진다. 기다림 없는 신앙은 결국 현실 앞에서 무너진다. 기도도, 예배도, 말씀도, 빠르게 결과가 보여야 의미 있다고 여길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속도’에 신앙을 두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의 경과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의지이며,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아도 여전히 그분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리, 그것이 기다림이다. 기다림 없이 얻어진 응답은 곧 우상이 된다. 하나님의 뜻보다 결과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고, 결국 하나님 없이도 믿음을 흉내낼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신앙은 시간을 품는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우리를 낮추시고, 깨뜨리시며, 다시 세우신다. 그 시간은 우리의 계획이 멈추고,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자리 잡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침묵은 부재가 아니다. 그분은 침묵 중에도 가장 깊은 일을 이루신다. 기도가 오래 지속될수록 마음이 정결해지고, 말씀을 오래 붙들수록 삶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듬어진다. 빠름은 변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면을 지나치게 한다. 느림은 답답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느림 속에서만 사람의 본질을 다루신다.
기다림은 하나님을 앞서지 않는 훈련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셔도 기도하는 사람, 말씀이 당장 현실이 되지 않아도 붙드는 사람,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예배하는 사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때를 이루신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절대로 헛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능력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하나님을 앞서려 하지 않고, 그분의 때를 믿고 머물 수 있는 신앙. 그것이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빠름은 효율을 남기지만, 기다림은 하나님을 남긴다. 믿음은 증거보다 신뢰에서 자라난다. 그리고 신뢰는 오직 기다림을 통해 증명된다
기다림은 단지 한 개인의 영적 태도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의 영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이며, 공동체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근본이다. 교회가 조급해질 때, 하나님의 뜻은 점점 흐려지고, 사람의 계획과 수단이 중심이 된다. 사역은 분주하지만 영혼은 메말라가고, 예배는 풍성해 보이나 내면은 무너진다. 빠름은 열매를 당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뿌리를 얕게 만든다. 기다리지 않는 교회는 깊어지지 못하고, 깊지 않은 교회는 결국 흔들린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속도’를 성장의 지표로 삼는다. 예배 인원은 얼마나 늘었는지, 봉사자는 얼마나 충원됐는지, 몇 개의 부서를 세웠는지가 곧 부흥의 증거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수치를 부흥으로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눈은 ‘얼마나 많아졌는가’보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는가’를 보신다. 기다릴 수 있는 공동체,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예배, 응답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기도.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교회의 본질이다.
사역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열정을 내지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사역이 지체되면 불안하고, 결과가 드러나지 않으면 실망하며, 인정을 받지 못하면 낙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며, 우리는 그분의 때를 분별하고 순종할 뿐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열심보다 순종을 요구하며, 속도보다 내면의 태도를 다듬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사람을 통해 하시지만, 언제나 사람보다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는다. 그래서 반드시 먼저 사람을 다듬으시고, 그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맡기신다.
예배도 기다림 없이 치러지는 경우가 많다. 찬양은 뜨거워야 하고, 설교는 감동적이어야 하며, 기도는 눈물로 끝나야 한다는 기준이 세워진다. 그러나 예배는 감정을 움직이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에 멈춰 서는 시간이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에 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조급히 나서지 않고, 그분의 뜻이 드러나기 전까지 내 생각을 멈추는 것. 그 기다림이 있을 때 예배는 비로소 하나님께 드려진다. 감정의 흐름은 오래가지 않지만, 임재는 사람을 바꾼다. 예배는 움직이기 전에 멈출 수 있어야 하고, 말하기 전에 듣는 자리여야 한다.
말씀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말씀을 듣고 즉시 삶에 효과가 나타나길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이다. 심겨지고, 뿌리내리고, 자라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면 말씀은 감동에서 끝난다.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순종은 피상적이 되고, 순종이 얕으면 삶은 바뀌지 않는다. 말씀은 즉각적인 변화보다 지속적인 형성을 이끈다. 기다릴 수 있는 사람만이 말씀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열매를 맺지만, 그 열매는 기다리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공동체 안에서도 기다림은 필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회개하고, 삶이 돌이켜지고, 성품이 다듬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기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조급하다. 왜 저 사람은 아직도 그럴까, 왜 변화가 느린가, 왜 헌신이 부족한가. 그렇게 판단하고 밀어내려 할 때, 공동체는 서로를 기다리는 사랑을 잃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오래 참으셨듯, 우리도 누군가를 오래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기다림은 사랑의 실천이며, 공동체의 진정한 성숙은 그 기다림을 견딜 수 있는 관계에서 드러난다.
신앙은 결국, 시간 앞에서 드러난다. 그 시간이 응답 없는 시간일 때, 침묵의 계절일 때,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신앙의 본질을 마주한다. 믿음은 전진보다 머무름에서 드러난다. 기다림 없이 움직인 신앙은 곧 벽에 부딪히고, 멈출 줄 모르는 신앙은 결국 하나님을 앞서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조급한 마음 안에서 듣기 어렵다. 하나님은 속삭이듯 말씀하시며, 그 음성은 오직 멈춘 자에게만 들린다.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은 성장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더 많은 사역이 아니라, 더 깊은 하나님의 뜻 앞에 머무는 것. 응답을 끌어내는 기도가 아니라, 뜻을 분별하는 기도. 흔들리지 않는 말씀의 뿌리, 감정이 아니라 임재에 반응하는 예배, 사람을 향한 오래 참음. 이것들이 기다림을 배우는 자리에서 회복된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그분은 여전히 기다리는 자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신다.
우리는 다시 묻고 기다려야 한다. 지금 내 안의 속도는 누구의 시간인가. 하나님의 시간인가, 나의 시간인가. 지금 내가 찾는 열매는 기다림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조급함에서 만들어낸 결과인가. 믿음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다. 하나님의 속도를 견디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자신을 내어드리는 자. 그 사람을 하나님은 붙드신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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