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늘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확신에서 출발하지만 삶은 그 선하심을 증명하기에 너무 어두운 순간을 동반한다. 거짓이 이기고 정의가 조롱당하며 선한 의도가 이용당하는 장면 앞에서 우리는 당황한다. 이 땅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 장면을 보게 하셨을까. 이 질문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묻게 한다 하나님은 때로 악을 막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끝까지 보게 하신다.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보게 하시고 겪지 않아도 될 것을 겪게 하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실 말씀이 있을 때 현실을 흔드신다. 그러므로 지금 이 불편함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순간일 수 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보고 듣는 것들이 고통스럽다고 고백했다. 그는 죄를 고발해야 했고, 회개하지 않는 백성의 무너짐을 막을 수 없었다. 견디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그는 하나님께 물었다. “왜 저런 것들을 계속 보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입에 내 말을 두었다.”
말씀이 있는 사람은, 말씀이 닿아야 할 현실 앞에 서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어두움을 피해 숨는 대신, 그 의미를 해석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우리는 이 세상을 분노하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니다. 읽기 위해 본다. 거룩한 눈으로 악을 통과해 하나님의 마음을 대면하는 사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지자이며 제자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자주 걸리는 뉴스와 사람과 사건들은 무엇인가. 도무지 공감되지 않는 무관심의 구조와 당연해진 불의. 그리고 그 속에서 점점 무뎌지는 나 자신. 하나님은 왜 이 모든 것을 지금 내 앞에 놓으시는가. 말씀을 읽어도 들리지 않던 날 말씀 외의 장면들로 나의 귀를 여시는 것은 아닐까, 믿음이란 어떤 신념의 지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내게 무슨 뜻으로 오는지를 묻는 구조다. 그러므로 불편함이 시작되었을 때, 신자는 질문해야 한다. 이 상황을 통해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
말씀이란 기록된 문장 이전에 하나님의 시선이다. 그 시선은 말로 오기도 하고 사건으로 오기도 하며 때로는 한 사람의 무너진 얼굴을 통해 온다. 눈을 감지 말라는 부르심이 있다. 귀를 닫지 말라는 경고가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지만 사람은 스스로 듣고 싶은 말만 남긴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은 말씀이 필요한 자가 아니라 말씀을 맡을 자를 찾고 계신다. 분노로 해석하지 말고 해석을 위해 분노하라. 상처로 반응하지 말고 반응을 통해 진리를 물으라. 이 불편함은 그냥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준비가 되었다는 징표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성전의 오염을 통과하셨고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으며 사람들의 악의를 피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침묵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불편한 현실을 통과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보고 듣는 모든 장면도 그분의 말씀 밖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 이전에 꿰뚫는 진실이고, 축복 이전에 흔드는 외침이며, 해석 이전에 먼저 보게 하시는 사건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내게 주신 말씀일 수 있다.
믿음의 여정에서 감정은 자주 기준이 된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감동이 없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며 멈추곤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종종 감정보다 먼저 오고, 그 부르심 앞에서 마음이 흔들릴 틈도 없이 순종이 요구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시작하실 때 반드시 우리의 감정을 설득하신 후에야 길을 여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보다 먼저 자리를 흔드심으로 뜻을 드러내시는 경우가 더 많다.
익숙하던 자리가 갑자기 불편해질 때가 있다. 특별한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닌데 일이 풀리지 않고, 의미 있게 느껴졌던 일이 어느 순간 공허해지며, 더는 예전처럼 집중할 수 없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한 피로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설명되지 않는 답답함이 쌓인다. 관계는 유지되지만 깊이가 사라지고, 기도는 이어가지만 감각은 무뎌지고 하나님의 임재는 점점 멀게 느껴진다. 그럴 때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묻기보다 ‘지금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은 순종해야 할 자리를 오래 방치하게 두시지 않는다 사명을 놓은 자리는 곧 무게가 된다. 하나님은 그 자리를 포기하게 하시기보다 일으켜 다시 걷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외면하고 멈춰 서 있을 때 하나님은 말씀이 아니라 현실을 통해 말씀하신다. 평안을 흔드심으로 관계를 깨우심으로 감정이 아닌 환경을 통해 방향을 틀게 하신다. 불편함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먼저 현실을 건드리는 방식일 수 있다.
신앙의 역사는 대부분 이동의 역사였다. 아브라함이 떠났고 요셉은 끌려갔고 모세는 돌아갔으며 바울은 길을 돌려야 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머물던 자리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해진 자리를 통해 하나님의 새 뜻을 발견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아무리 익숙하고 안전해 보이더라도 그곳에서의 순종이 멈췄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자리를 다시 묻게 하신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보게 하신다. 내가 계속 외면하고 있던 그 작은 감동 미루고 있었던 순종의 자리 외면했던 사람과 무시했던 부담이 결국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방향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리를 옮기실 때 반드시 그것을 감정으로만 설득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마음은 여전히 예전 자리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 자리에서 떠나셨을 수 있다. 그렇다고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부르심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붙들고 있는 자리를 손에서 놓게 하시고 시선을 돌려 우리가 피하던 곳을 보게 하신다. 그 일은 때때로 매우 조용히 시작된다 아무 감정도 없이 그저 이유 없는 불편함으로 설명되지 않는 낯섦으로 그 작은 징후들이 바로 하나님의 초대일 수 있다.
믿는 사람은 마음이 흔들릴 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다시 묻는 사람이다. 말씀이 들리지 않는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멈추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불편한 이유는 내가 맡아야 할 일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감정을 따라가지 말고 순종할 일을 살펴야 한다. 확신이 없어도 결단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점점 무거워진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다른 곳으로 나를 부르고 계신 것일 수 있다. 하나님은 늘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그 말씀을 외면할 때는 자리를 통해 다시 깨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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