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은 무너졌는가, 아니면 진화했는가

 

인류의 역사에서 “쌓는다는 것”은 단순한 건축 행위 그 이상을 의미해왔다. 인간은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고, 그 벽돌로 집을 짓고, 탑을 올리며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해왔다. 그러나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은 우리에게 그 행위가 갖는 영적 본질을 묻는다. 그들은 말했다. “자, 성읍과 탑을 세워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기술과 질서의 결합, 연대의 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열망. 그러나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었다.

바벨의 비극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잊고 자신들의 뜻만을 따라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가려 한 데 있다. 그것은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구원을 설계하려는 시도였다.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의 질서로 대체하려는 집단적 야망.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고, 그 계획을 흩으셨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성경은 그 탑이 무너졌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그 탑은 존재했고, 세대와 문명을 거치며 새로운 형태로 되살아났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사람들은 클릭 하나로 세계 어디와도 연결된다. 언어의 장벽은 점차 허물어졌고, 코드와 알고리즘은 전 지구적인 공통 언어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통합과 연대를 외치며, 인간 중심의 효율성과 편의를 극대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바벨의 형상을 보게 된다. 높이 쌓은 탑은 아니지만, 더욱 넓고 정교하게 짜인 네트워크가 우리를 감싸고 있다.

바벨의 본질은 단지 높이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흩어짐’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인간의 계획으로 대체한 데 있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에 충만하고, 번성하며, 퍼지라고 명령하셨지만, 바벨의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기 위해 성읍을 계획하고, 탑을 세우고, 하나의 이름 아래 모이기를 원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일치와 협력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도전이었다.

현대 문명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도시를 쌓지 않는다. 대신 디지털 공간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곳에서는 언어가 같고, 가치가 비슷하며, 규칙이 통일된다. 각자의 문화와 고유성을 넘어서 모두가 같은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 현실. 이는 점차 인류를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질서, 하나의 기준 속으로 수렴시키고 있다.

기술과 문화, 경제와 정책이 국경을 넘어 유사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단지 진보의 증표만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인류의 오래된 시도의 재현일 수 있다. 누구도 눈에 보이는 탑을 짓고 있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탑은 이미 우리 일상 곳곳에 깊이 들어와 있다.

무엇보다 오늘의 바벨은 ‘하나의 언어’라는 점에서 과거보다 더 강력하다. 창세기에서는 언어의 혼잡이 인간의 야망을 흩뜨리는 하나님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시 언어를 통합하고 있다. 영어는 세계의 공용어로 자리 잡았고, 컴퓨터 언어는 감정 없는 정확성과 효율성으로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다. 정보는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가치 판단은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하며, 사회의 움직임은 예측 가능한 경로를 따라가도록 설계된다.

이러한 구조는 겉으로는 안정과 효율을 보장하지만, 그 안에서는 개별성의 침묵과 고유성의 소멸이 일어나고 있다. 다름이 존중받기보다는 정해진 기준에 맞춰지기를 요구받고, 비판보다 순응이 요구된다. 사람들은 시스템 안에서 ‘편리’를 얻지만, 동시에 ‘질문하는 능력’을 잃어간다.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제안된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하며, 구조 밖에서 사고하는 것을 점차 잊는다.

신앙인은 이와 같은 시대 흐름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모든 기술을 거부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기술이 어떤 방향을 지향하는가를 분별해야 한다. 탑은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 탑이 세워지는 중심에는 반드시 목적이 존재한다. 하나님을 향하는가, 아니면 인간 자신을 위한 구조인가. 이것을 분별하는 것이 신자의 사명이다.

또한 신자는 세상이 세우는 탑과는 다른 탑을 쌓아야 한다. 그것은 ‘하늘로 올라가는 탑’이 아니라, ‘하늘이 이 땅에 임하는 탑’이어야 한다. 바벨은 인간이 하늘에 도달하고자 했지만, 믿음의 삶은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구한다. 그 탑은 세상의 눈에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예배의 자리에서,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의 습관 속에서, 진리로 걸어가는 조용한 선택 속에서 쌓인다.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 삼는다. 세상의 시스템은 명확한 수치와 구조로 자신을 증명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시는 집은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가정의 중심에서,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한 사람의 정직한 순종 속에서 견고히 서간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집은 무너지지 아니하리라.”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정보가 흘러가고, 수많은 구조가 세워지고, 수많은 기준이 정립되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가? 인간이 세우는 탑은 결국 무너질 것이다. 그 탑이 아무리 높고 정교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중심에 계시지 않다면 그것은 결국 흩어질 운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각자의 삶에 세워지고 있는 탑을 점검해야 한다. 그 탑은 누구를 위해 세워지고 있으며, 무엇 위에 세워지고 있는가?

하나님은 과거의 바벨을 흩으셨다. 그리고 오늘도, 그분은 여전히 말씀하고 계신다. 지금 우리가 세우는 것들은, 과연 하나님의 집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바벨인가. 이 질문 앞에 서는 것,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의 시작이다.

보이지 않는 탑에 맞서 말씀 위에 집을 세우라

우리는 종종 바벨탑을 과거의 유물처럼 생각한다. 한때 시도되었으나 무너진 인간의 허영, 하나님 앞에서 좌절된 야망. 그러나 바벨의 본질은 한 시대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 인간의 본능적 흐름이다. 바벨탑은 무너지지 않았다. 단지 그 모양을 바꾸었을 뿐이다.

오늘날의 바벨은 눈에 띄지 않는다. 벽돌 대신 데이터와 플랫폼, 구조 대신 시스템과 네트워크가 그 탑을 이루고 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인간이 스스로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욕망이 숨 쉬고 있다. 오늘날의 세상은 하나님 없이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교육, 경제, 환경, 심지어 윤리와 정의까지도 인간이 설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벨의 핵심은 기술이나 구조가 아니라 중심이다. 누구를 중심에 두고 있는가. 인간인가, 하나님인가. 스스로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우리가 쌓는 것이 바벨인지 예루살렘인지가 결정된다.

신자는 시대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비판이라는 것은 단순히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판단하는 영적 감별력이다. 오늘 우리는 ‘기술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위탁하고 있다. 일상, 금융, 건강, 교육, 심지어 예배까지도 디지털 시스템에 의존한다.

편리하고 정교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질문이 사라져 있다. ‘이 구조는 하나님을 더 가깝게 하는가, 아니면 멀어지게 하는가?’ ‘이 편리는 나의 신앙을 더 깊게 하는가, 아니면 무디게 하는가?’ ‘이 시스템은 내가 하나님 앞에 더 겸손하게 서게 하는가, 아니면 나를 주체로 만들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조용히 그리고 집요하게 반복되고 있는 바벨적 흐름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무질서하게 세워진 것이 아니다. 매우 정교하고 조화롭게 보인다. 그 속에서는 ‘효율’과 ‘통합’이라는 가치가 강조되며, 신앙은 점차 공적 영역에서 사라지고, 개인적 취향이나 선택으로 밀려난다. 결국 믿음은 제도와 구조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는다.

이런 시대일수록, 신자는 더 단단한 기준을 붙잡아야 한다. 세상의 흐름은 바뀔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주님의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기준이 흔들릴 때, 믿음의 사람이 붙들어야 할 유일한 기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세워야 하는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바벨의 탑이 수직적으로 하늘을 향해 올라가려 했다면, 하나님의 집은 수평적으로 확장된다. 한 사람의 신실한 삶이 또 다른 생명을 세우고, 진리로 자녀를 양육하고, 진실한 공동체를 형성할 때 그곳이 곧 하나님의 집이 된다.

말씀을 붙든 삶은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깊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과 속도보다, 신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진다. 그것은 높이 쌓는 것이 아니라, 깊이 뿌리내리는 것이다. 말씀 안에 머무는 기도, 진리를 따르는 습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삶의 자세. 이 모든 것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의 탑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싸움은 결코 개인의 몫만은 아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바벨 흐름에 맞서 진리의 공동체로 서야 한다. 더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 프로그램이 아니라 복음, 전략이 아니라 순종, 이벤트가 아니라 예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바벨의 구조를 닮아갈 때, 우리는 기능적으로는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무너진다. 건물과 조직은 남아 있을지 몰라도, 영적 생명은 사라진다. 그렇기에 교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고백을 공동체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시대의 풍랑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기초다. 세상은 모래 위에 아름답고 거대한 구조물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모래는 무너진다. 바람이 불고, 물이 차오르면, 본질이 드러난다. 그때 무엇이 남는가.

신자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 위에 집을 짓고 있는가.” “나의 신앙은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에 뿌리내리고 있는가.” “내가 따라가는 흐름은 세상인가, 하나님인가.” 이 질문 앞에서 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분별이다.

마지막 시대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바벨의 흐름은 마지막 때에 더욱 정교하게, 더욱 강력하게 등장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 흐름을 ‘큰 성 바벨론’이라 표현하며, 영적 타락과 세속 권세가 결합한 최후의 구조물로 묘사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말한다. 그 구조물은 스스로 무너진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땅에 임하는 그 나라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소리 높여 외치는 일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신실하게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을 따르는 것, 예배를 포기하지 않는 것, 공동체를 지키는 것, 고난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보는 것. 이 모든 작고 단단한 순종들이 하나님의 집을 세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벨은 또 하나의 벽돌을 얹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선택해야 한다. 편리함보다 진리, 속도보다 방향, 규모보다 본질. 이 싸움이야말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의 진정한 전쟁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다시 기초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 예배. 기도. 공동체. 그리고 순종. 이 네 가지가 우리의 삶을 지탱할 반석이 되어야 한다. 그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매일말씀저널 |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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