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 예배는 참된 예배일까, 가상공간에서 신앙의 본질을 묻다

가상의 교회, 현실을 대체할 수 있을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예배’라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대면 예배가 일반화되었고, 영상으로 설교를 듣고 댓글로 아멘을 다는 것이 익숙한 시대가 되었다. 그 흐름 위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메타버스 예배’다. 메타버스란 가상현실 공간을 뜻하는 말로, 아바타가 등장하고, 가상의 예배당에서 찬양과 설교, 심지어 성찬까지 진행하는 모습이 현실이 되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교회들이 메타버스 플랫폼인 로블록스, 제페토, 디센트럴랜드 등에 가상 예배당을 세우고, 청소년부나 청년부 중심으로 새로운 형식의 예배를 시도하고 있다. 초기에는 홍보 목적의 이벤트로 보였던 이 현상은 점점 더 진지한 ‘예배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메타버스에서 드리는 예배도, 진짜 예배가 될 수 있는가?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예배란 무엇인가’이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는 단지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며, 전인격적 헌신의 표현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식이 완전히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영적 예배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예배가 ‘삶의 전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초대 교회는 ‘모이기를 힘쓰는’ 공동체로 존재했다.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떡을 떼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

그렇다면 메타버스 예배는 이 ‘함께함’과 ‘실제성’을 충족할 수 있는가? 아바타끼리 마주 보고 있는 것이 공동체인가? 채팅으로 “아멘”을 외치는 것이 고백인가? 가상의 포도주와 떡으로 진행되는 성찬은 과연 성례전인가? 이 질문들은 단순히 기술적 가능성을 넘어 예배의 신학적, 영적 본질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문제다.

기술은 도구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왔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은 성경을 대중화했고, 라디오와 TV는 복음 전파의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인터넷은 설교와 묵상을 누구나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메타버스 역시 복음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사용하는 태도다. 기술은 도구로 사용할 때 선하지만, 목적이 되면 우상이 된다. 메타버스 예배가 기술 중심의 트렌드가 되어버린다면, 그것은 교회가 본질을 놓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예배는 편의나 효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경외와 전심의 문제다.

가상에서 가능한 것은 형식이지, 본질이 아니다

메타버스 안에서 예배당을 지을 수 있고, 설교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 찬양도 재생할 수 있고, 심지어 성찬과 세례를 ‘재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적 신앙 행위’가 되는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성찬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모여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함께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성례다. 세례는 물을 사용하는 실질적인 행위이며, 신앙 고백이 담긴 인격적 선언이다. 이 모든 것들을 아바타와 가상 인터페이스로 대체하는 것은 ‘예배의 상징화’가 아니라, ‘예배의 축소화’로 이어질 수 있다.

신앙의 중심은 만남이다

예배란 무엇인가? 결국 하나님과의 ‘실제 만남’이다. 그리고 교회란, 예배의 공동체다. 디지털 기술은 이 만남을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 만남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메타버스 예배는 유익한 ‘보조 수단’이 될 수는 있다. 특히 물리적 제약이 있는 상황(감염병, 장애, 거리)에서는 매우 귀중한 통로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예배의 대체재’로 전환될 때, 교회는 예배의 본질을 훼손하게 된다.

신학적으로 보면, 성령의 역사와 임재는 기술적 환경에 제한받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기술 환경에 쉽게 영향받는다. 가상 공간에서 집중하고, 헌신하고, 감동하는 것은 물리적 현실보다 훨씬 어렵다. ‘몰입’이 아니라 ‘편안함’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정한 예배가 요구하는 마음가짐과는 거리가 있다.

교회는 본질을 붙잡아야 한다

교회는 시대의 흐름에 민감해야 하지만,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된다. 메타버스 예배를 실험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다. 그러나 그 실험이 예배의 중심이 되는 순간, 교회는 방향을 잃을 수 있다. 교회는 ‘기술 플랫폼’이 아니라 ‘영적 공동체’다. 가장 낮은 자와 함께 울고, 함께 떡을 떼며, 함께 기도하는 공간이 교회다. 그리고 그것은 가상공간으로는 결코 완전히 구현되지 않는다.

기독교의 강점은 언제나 ‘구체성’에 있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복음을 외치신 분이 아니라, 이 땅에 내려오셔서 육신을 입고 우리와 함께 거하신 분이다. 그분의 사역은 현실 속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사역이었다. 그렇다면 교회 역시 현실의 고통과 부딪히는 자리에서 존재해야 한다. 메타버스라는 공간이 그 고통과 교제할 수 없다면,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담을 수 없다.

결국 예배란, 영광 앞에 무릎 꿇는 실제의 행위이다. 기술은 그 길을 열어줄 수 있지만, 예배의 무게를 대신 짊어질 수는 없다. 메타버스 예배는 미래 교회의 가능성 중 하나일 수 있지만, 절대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짜 예배는, 하나님 앞에 몸과 마음을 드리는 그 자리에서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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