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다. 수없이 들어온 구절이다. 그 말씀은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죄인을 회개하게 한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이 확신은 자주 흔들린다.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도 바뀌지 않는다. 예배를 드리고, 큐티를 하고, 설교를 반복해서 들으며 수년을 보냈지만, 여전히 성격은 그대로이고, 죄의 반복은 멈추지 않는다. 신앙의 열매는커녕 일상의 말 한마디조차 거룩하지 않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마음의 중심을 지키는 데서, 자신이 믿는 복음의 능력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많다. 말씀은 선포되는데, 삶은 바뀌지 않는다. 그 괴리는 날이 갈수록 더 선명해진다.
그런 때, 사람들은 두 가지 길 앞에 선다. 하나는 체념이다. “내가 문제지”라며 자신을 비난하거나, “말씀이란 원래 이런 거구나”라며 기대를 버리는 쪽이다. 또 하나는 무기력한 반복이다. 달라지지 않는 걸 알면서도 그 자리를 그냥 유지하는 것이다. 신앙은 현실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종교로, 말씀은 감동 없는 낭독으로 변해간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뀌지 않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를 속이는 데 익숙해진다. 외형은 그대로지만, 내면은 점점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은혜 받았다”는 말은 입에 남아 있지만, 삶은 어제와 다르지 않다. 복음이 일상을 흔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말씀은 더 이상 진리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을 단지 ‘변화의 도구’로만 말하지 않는다.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며, 하나님 자신이다. 변화는 말씀의 열매이지, 말씀의 본질이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의 변화가 더디다고 해서 말씀이 실패한 것이 아니다. 말씀을 들었는데도 내가 여전히 같은 죄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말씀의 무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아직 머무는 중이라는 뜻이다. 변화는 약속되지 않았다. 오직 말씀 앞에 머무는 일이 요구되었을 뿐이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수많은 무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그 말씀에 감동을 받았지만, 삶으로 이어가지 않았다.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병이 나았고, 어떤 이는 감동을 받았지만 돌아섰다. 열두 제자도 말씀을 들었지만 배반했고, 부활을 본 이들조차 의심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말씀하셨다. 심지어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에도, 그는 말씀을 그치지 않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반응 없는 심령 앞에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변화는 사람의 몫이 아니고, 말씀의 시기 또한 하나님이 정하신다.
말씀이 삶을 바꾸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 자신의 속도를 멈추는 것이다. 변화는 느려도, 말씀이 멈춘 것은 아니다. 복음은 나의 감정이나 반응에 따라 효력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시간 속에서 말씀을 붙들 때, 비로소 복음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것은 내 삶을 장식하는 윤리가 아니라, 나를 살리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변화 없는 삶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지만, 그 자리에서조차 말씀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신앙의 여정에서 사람은 종종 바뀌지 않는 자신을 가장 두려워한다. 말씀을 읽고도 참지 못하고, 기도한 후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럴 때면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들고, 말씀은 점점 더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록되었다. 시편은 같은 탄식을 반복하는 고백으로 가득하고, 바울도 자신이 원치 않는 죄를 반복하는 자신을 절망스럽게 묘사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변화는 느렸고, 때로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 과정 전체를 믿음으로 보셨다.
말씀이 삶을 바꾸지 않을 때,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변화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정죄가 아니라, ‘변화를 조급하게 요구한 자세’에 대한 돌이킴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속도에 맞추어 일하시지 않는다. 어떤 경우는 수년이 걸리고, 어떤 경우는 오직 죽음 이후에야 완성되는 변화도 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시점이 아니라, 그 시기를 견디는 자세다. 말씀은 기다림 속에서 더 깊어진다. 반응이 없을수록, 침묵이 길수록, 그 말씀은 사람의 심령 깊은 곳으로 스며든다.
예수님은 겨자씨 하나만큼의 믿음을 가진 자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산을 옮긴 자”를 찾아 칭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제자들을 끝까지 품으셨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주님은 변화보다 믿음을 더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변화는 결과이지만, 믿음은 관계다. 하나님은 변화를 측정하지 않으시고, 관계를 보신다. 그래서 말씀은 늘 먼저 관계를 회복하는 데 사용된다.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가보다, 지금도 하나님 앞에 머물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말씀이 삶을 바꾸지 않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을 다시 붙들어야 한다. 말씀을 신뢰하는 일이 때론 삶보다 앞서야 할 때가 있다. “말씀대로라면 나는 살아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그렇지 않다”는 절망이야말로 믿음의 가장 고요한 자리다. 거기서 하나님은 일하신다. 그리고 그 믿음을 기뻐하신다. 바뀌지 않는 사람을 꾸짖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을 기다리신다. 말씀이 오늘도 들리고 있다면,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느려도 괜찮다. 길어도 좋다.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
말씀이 삶을 바꾸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은, 사실 변화가 감춰져 있는 시기일 수 있다. 사람은 감정과 결과를 통해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습관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은 깊은 내면의 움직임까지 보신다. 겉으로는 여전히 예전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이미 포기하지 않는 믿음, 떠나지 않으려는 의지, 말씀을 의심하지 않으려는 작은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을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을 증언한다. 사무엘상에서 하나님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중심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감정으로도 측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중심 안에 있는 ‘붙드는 힘’을 보신다. 변화는 느껴지지 않아도, 믿음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경 인물 중 요나처럼 말씀을 듣고도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도망친 인물도 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 하셨지만, 그는 정반대 방향의 배에 올랐다. 말씀은 선포되었지만, 삶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건, 하나님이 그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말씀은 요나를 따라 바다 끝까지 간다. 풍랑 가운데도, 물고기 뱃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요나는 결국 다시 말씀을 향해 걷게 되지만, 그의 삶은 한 번에 변화되지 않았다. 니느웨에서 설교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분노했고, 여전히 하나님의 뜻에 불만을 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다시 데려오셨고, 인격적으로 다루셨다. 말씀은 삶을 바꾸지 못한 요나를 향해, 계속해서 다가갔다. 이것은 ‘성공한 변화’의 기록이 아니라, ‘변화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다.
이 기다림은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다. 복음은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공식이 아니다. 듣는 즉시 변화시키고, 결단하면 곧바로 삶을 바꾸는 자동 명령이 아니다. 말씀은 씨앗이고, 씨앗은 흙 속에서 죽는 시간을 거친다. 마가복음 4장은 네 가지 밭의 비유를 말한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그리고 옥토. 우리가 바라는 건 단연 옥토다. 그러나 현실은 가시떨기밭과 돌밭 사이에 있다. 말씀은 듣지만, 삶의 걱정과 욕심, 환경의 압박, 오래된 상처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밭을 향해 말씀을 계속 뿌리신다. 밭이 달라지지 않았어도, 말씀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는 정죄가 아닌 은혜다. 변화가 없는 땅도 복음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선언이다.
말씀이 삶을 바꾸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기도량을 늘리고, 말씀을 더 반복하고, 더 강한 다짐을 하며 이겨보려 한다. 그것이 성숙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 모든 열심 뒤에 ‘내가 나를 바꾸겠다’는 조급한 의지가 숨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의 주인이 되길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포기하지 않는 고백이다. 여전히 죄가 남아 있어도, 여전히 어제와 같은 자신을 보고도, 말씀 앞에서 “나는 주님을 따릅니다”라고 고백하는 마음. 복음은 그 고백에 머무른다. 하나님은 자주 변하지 않는 사람을 쓰셨다.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반복했고, 베드로는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갔으며, 마가는 바울과 사역을 중단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놓지 않으셨고, 말씀은 그들 안에서 결국 일하셨다.
말씀이 삶을 곧바로 바꾸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변화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도 복음을 떠난 것도 아니다. 자리를 지키며 말씀 앞에 머무는 이들, 기도할 말이 없어도 여전히 무릎을 꿇는 이들은 그 중심에 말씀을 향한 붙듦이 남아 있다. 복음은 그 붙듦의 중심에서 오늘도 일하신다. 변화는 더디게 오지만, 말씀은 이미 그 사람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결코 거두지 않으신다. 시간이 걸릴 뿐이며, 그 시간 동안에도 말씀은 멈추지 않고 자라나 결국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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