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축복인가 시험인가, 믿음의 눈으로 본 부와 성공

‘돈’이라는 단어는 이제 단순한 거래 수단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 가치, 심지어 신앙의 수준까지 평가하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누군가의 직업을 설명할 때 연봉이 기준이 되고, 인간관계를 설명할 때도 경제적 배경이 신뢰와 존경의 척도가 되며, 심지어 신앙생활마저 ‘하나님께 복 받는 법’이라는 제목 아래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다 물질은 복인가, 아니면 현대의 우상인가? 이 질문은 단지 이론적인 논의가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신자라면 누구나 매일같이 마주치는 실전 신앙의 핵심 주제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급격하게 가속된 양극화, 부동산 폭등, 고금리·고물가 현실은 많은 성도들에게도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었고, 신앙의 시험대로 기능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돈’에 대한 설교는 여전히 민감하고 피로도가 높은 주제이지만, 동시에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민감한 영역에서 성경적으로 사고하고, 믿음의 태도를 지킬 수 있을까?

성경은 돈에 대해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비유 중 상당수가 재정에 관련된 주제를 다룬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달란트의 비유, 불의한 청지기, 빚진 자의 비유, 부자와 나사로 등은 모두 돈을 소재로 삼지만, 그 핵심은 돈 자체보다도 돈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와 내면의 중심을 조명한다. 특히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구절은 단호하고 분명하다 돈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섬김’을 유도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과 경쟁하는 자리에 놓일 수 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 역시 자주 인용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여기서도 강조되는 것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마음’, 즉 그것에 기대고 의지하며 삶의 중심으로 삼는 태도다. 실제로 재정이 부족해서 무너지는 신앙보다, 재정이 충족되어 교만해지거나 안일해지는 신앙이 더 많다는 점에서 이 경고는 가볍게 들을 수 없다.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나타나는 돈에 대한 태도는 양극단으로 나뉜다. 한편에서는 경제적 축복을 신앙의 열매로 간주하며, 믿음의 결과가 물질적 성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명 ‘번영신학’이다. 반면 또 한쪽에서는 물질 자체를 경계하며 가난을 마치 영적 미덕처럼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해 균형 잡힌 시선을 요구한다 돈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의 하나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영적 상태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부한 자는 그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가난한 자는 자족함과 정직함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이러한 시선은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는 부자들을 무조건 정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어떤 부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사역을 지원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이 소유에 얽매여 있을 때는, 그것이 믿음을 방해한다고 지적하셨다. 마가복음 10장의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다. 그는 율법을 지키는 신앙인이었지만, 재물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청년을 비난하기 어렵다 사실 많은 신자들이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현실의 경제 문제는 복음의 이상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자녀 교육비를 준비해야 하며,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 헌금을 드리고 싶어도 지출을 줄이기 어렵고, 사역을 지원하고 싶어도 생활비가 빠듯하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재정 사용’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던져진다.

정답은 단 하나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기준은 있다. 돈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나는 청지기로서 그 돈의 사용 방향을 하나님께 묻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버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자녀에게 물려줄 유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고자 했던 부모의 흔적이다.

현대 사회는 여전히 성공을 이야기할 때 경제적 풍요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다른 정의를 제시한다. ‘성공’은 세상 기준에서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향해 꾸준히 순종해 가는 삶이다 돈이 그 여정에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지만, 만약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시험이다.

이 글은 부자가 되지 말라는 메시지도, 가난해야만 거룩하다는 주장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앙이 이 시대 속에서 돈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다룰지를 고민하자는 초대다. 돈을 ‘신앙의 거울’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자신의 믿음이 어디쯤 있는지도 함께 들여다볼 수 있다.

성경은 돈에 대해 방대한 침묵을 지키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 전체를 통틀어 돈과 재물, 소유와 청지기 정신에 대해 언급한 구절은 수백 군데에 이른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을 다루는 방식, 돈을 대하는 마음, 돈을 중심에 놓을지 하나님을 중심에 둘지를 깊이 주목하신다 재물은 단순한 도구 같지만,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교묘한 신’이 되기 쉬운 존재다. 그것이 축복으로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에 오르면 곧바로 시험으로 바뀐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처한 경제 현실은 너무나 복잡하고 현실적이다. 2030대는 등록금과 월세, 4050대는 자녀 양육과 주택 대출, 60대 이후는 노후 대비와 건강 문제 등 인생의 거의 모든 시기가 돈과 얽혀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회는 종종 재정을 금기시하거나 피상적으로만 다룬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물질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마주보고 복음의 기준으로 다루기를 원하신다. 신앙은 현실과 무관한 도피처가 아니라,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진리를 따라 살아가게 하는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만들어낸 ‘성공’이라는 개념은 대부분 물질적 기준에 기반하고 있다 높은 연봉, 빠른 승진, 자산 증식, 부동산 투자, 안정된 금융 포트폴리오. 사회는 이러한 외적 지표를 성공의 기준으로 삼고, 이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열등감을 주입한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가치관이 무의식 중에 스며들어, 복음을 돈으로 해석하거나 헌신을 실적화하려는 경향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성공’이라는 개념을 다르게 정의한다. 성공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순종하며 살았는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떻게 살아내려 애썼는지에 달려 있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때때로 손해처럼 보이고, 실패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단 한 번도 경제적 성공을 목표로 삼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나셨고,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인생을 사셨으며, 마지막에는 겉옷 한 벌마저 벗긴 채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나 그분의 삶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의 삶은 진리였고, 그분의 가난은 하늘의 부요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복음은 세상의 재정 논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오늘날 우리가 부를 꿈꾸는 이유는 대부분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다. 그것이 가족을 위한 것이든, 안정된 노후를 위한 것이든, 궁극적으로는 ‘평안’을 얻기 위해 돈을 쫓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평안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요 14:27) 이 말은 곧, 세상이 말하는 ‘경제적 안정’과 성경이 말하는 ‘영적 평안’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뜻한다. 전자는 외적인 조건에 의해 좌우되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 때 오는 내면의 확신이다.

그렇다면 돈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재물을 ‘관리하라’고 명한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을 정직하고 지혜롭게 사용하는 청지기로서의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을 위해 모으기만 하는 삶이 아니라, 이웃을 살피고 교회를 세우며, 복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열린 손이 되어야 한다. 2천 년 전의 삭개오가 그렇지 않았는가. 세리장으로 부정하게 재물을 쌓아온 그가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의 재산 절반을 나누고, 억울하게 착취한 사람들에게는 네 배로 갚겠다고 했다 그의 회심은 단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재정의 방향을 바꾸는 실천으로 나타났다.

오늘날에도 크리스천의 회개는 돈과 시간, 재능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다시 점검하는 일에서 출발할 수 있다. 예배만 드린다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어떤 기준으로 쓰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곧 ‘생활 속 믿음’이다. 소비, 기부, 저축, 투자, 후원… 이 모든 영역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거울과 같다.

사실 재정은 우리의 내면을 드러내는 가장 정확한 테스트 중 하나다. 돈이 생겼을 때 내가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돈이 모자랄 때 나는 누구를 먼저 찾는가? 여유가 생겼을 때, 그 여유를 통해 누구를 기쁘게 하려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의 믿음이 말로만 머물러 있는지, 삶으로 뿌리내렸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돈을 주실 수도 있고, 거두어 가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분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주님 앞에 “이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마음, 내가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잊지 않는 마음, 그래서 늘 겸손하게 사용하는 손. 이 마음이 있을 때, 돈은 축복의 도구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시험의 도구로 바뀌게 된다.

결국 크리스천에게 돈은 삶의 도구이자, 동시에 믿음의 시험지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돈 앞에서는 계산기를 먼저 두드리는 우리,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결정은 경제성에 따라 내리는 우리. 이 모순의 순간마다, 우리는 복음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이 어떤 부를 추구하셨고, 우리에게 어떤 기준을 요구하셨는지를 떠올려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해야 할 것은 부동산도 주식도 연금도 아니다. 우리가 소유해야 할 유일한 가치는 하나님의 마음이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순종이다. 그렇게 살기 위해 돈이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없다면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그것은 짐이요, 걸림돌일 뿐이다.

세상은 여전히 돈을 부르고, 사람들은 여전히 성공을 좇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묻고 계신다.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이 나이냐, 아니면 그것을 대신할 수단이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리고 그 선택이 곧, 우리의 신앙을 말해주는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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