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의 탄식, 하나님 앞에 우는 신자의 기도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사람은 침묵하거나 울부짖는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은 그 울부짖음을 하나님께로 향한다. 시편은 그런 기도들의 집합이다. 찬양의 노래로 알려진 시편은, 사실 그 내용의 절반 이상이 탄식이다. 하나님을 향해 던지는 절규, 고통의 이유를 묻는 질문, 원수를 향한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도무지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괴로움이 시편 곳곳에 흘러넘친다. 그 탄식은 신앙의 약함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정직함이다.
시편의 저자들은 고난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종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언제까지 숨으시겠나이까”라고 묻는다. 이는 단순한 푸념이 아니다. 그 질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이다. 무신론자는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는 침묵 속에 절망하거나, 자신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할 뿐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들은 외면당한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께 말한다. 그것이 신앙이다.
대표적인 탄식시 중 하나인 시편 13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외침이 나온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이는 신앙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질문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그 침묵이 더 고통스럽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향해 말한다. 이 긴장, 이 모순, 이 간극이야말로 진짜 기도다. 그것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영혼의 외침이다.
이러한 기도는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현대 교회는 기도를 종종 성공의 도구처럼 다룬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거나, 문제 해결을 위한 주문처럼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시편의 기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시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부끄러움도, 분노도, 슬픔도 숨기지 않는다. 감정을 다듬지 않고, 상황을 가리지 않는다. 시편의 기도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붙드는 이들의 치열한 몸부림이다.
시편의 탄식은 회복의 시작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쏟아붓는 원망과 눈물, 혼란과 좌절은 하나의 고백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나는 주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였사오니.” 탄식시는 거의 대부분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고백으로 나아간다. 고난이 끝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침묵을 깨셔서가 아니라, 기도하는 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그러나’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앙의 힘이다. 현실은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드는 고백이 나온다.
탄식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든다. 진짜 관계는 갈등을 회피하지 않고,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마음을 드러내는 데서 깊어진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탄식은 하나님을 향한 배신이 아니라, 친밀함의 표현이다. 하나님 앞에서 울 수 있다는 것은, 그분을 여전히 믿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탄식은 신앙의 균열이 아니라, 성숙으로 나아가는 통로다.
예수님도 탄식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시편 22편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는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가장 깊은 신앙 고백이었다. 그분은 하나님의 침묵을 통과하셨고, 그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셨다. 시편의 탄식은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절정을 이루었고, 십자가의 어두운 밤은 부활이라는 아침으로 이어졌다.
이 시대의 신자들은 고난 앞에서 말을 잃는다. 고통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단순한 위로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있다. 하지만 시편은 말한다. 말을 잃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울어도 된다고. 설명할 수 없을 때, 그냥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도 괜찮다고. 시편의 저자들은 우리의 고통을 미리 대신 울어준 이들이다. 그들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되고, 그들의 탄식은 우리의 신음에 언어를 부여한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 고난을 없앨 수 없다. 그러나 시편의 기도는 고난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울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큰 위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침묵도 들으시고, 우리의 눈물도 기억하신다. 우리가 말할 수 없을 때조차, 시편은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께 울어준다. 그렇게 시편은 고통의 사람들을 위한 노래책이며, 탄식하는 신자들의 기도서다.
시편의 기도는 단지 문학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실제 고난 속에서 드려진 생생한 신앙의 언어다. 이 기도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울어도 된다. 감춰도 되는 것이 없고, 속일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 눈물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더 가까이 보게 된다. 고난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고난은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이유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찾는 가장 진실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신자의 삶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대답이 들리지 않고, 기도했으나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오히려 신앙이 깊어질수록 고난은 더 무겁게 느껴진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입을 다물거나, 포기하거나, 혹은 체념하려 든다. 하지만 시편은 그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침묵이 아니라 탄식이다. 단념이 아니라 정직한 질문이다. 시편은 고난 앞에서 무너진 심령을 대신해 하나님께 울고, 묻고, 때로 항변까지 하는 성도의 진실한 기도를 담고 있다.
시편 42편에서 시인은 말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붙들고 이야기한다. 낙심이 몰려오고 불안이 가득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한 자기 암시가 아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외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이 갈급함은 추상적인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실제적인 고통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우리는 때로 신앙인이 고난 중에도 침착하고 평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편은 그렇지 않다. 시편 기자들은 깊은 절망 속에서 무너지고, 쓰러지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쏟아낸다. 그들은 하나님께 분노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침묵에 대해 항변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는 것, 그것이 바로 시편이 보여주는 참된 믿음이다.
탄식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진실한 믿음은 현실을 똑바로 보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 묻는다. “어찌하여…”, “왜…”, “언제까지…” 시편은 이 질문들을 허용하고, 오히려 격려한다. 이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께 따져 묻는 것이다. 부모를 신뢰하는 자녀만이 불만을 표현하고, 사랑하는 이에게만 진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편의 탄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시편은 단지 개인의 고난만 다루지 않는다.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아픔을 담아낸 시도 많다. 민족의 멸망, 포로 생활, 전쟁과 압제 속에서 드려진 기도들이다. 시편 74편은 성전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조롱당하는 가운데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친다. 이런 기도는 오늘날 전쟁과 재난, 억압과 불의 속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의 기도와 다르지 않다. 시편은 고난의 역사를 사는 공동체의 기도서이기도 하다.
시편의 탄식이 특별한 이유는, 그 끝이 대개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시편 73편에서 시인은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받는 현실 앞에 좌절한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후, 그는 고백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이 없나이다.” 현실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바뀌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울부짖고 난 후, 그는 이전보다 더 깊은 확신을 갖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기도의 힘이다. 시편은 응답을 요구하지만, 응답이 없다고 해서 기도를 중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도 그 자체가 응답을 낳는 길이 된다. 하나님은 때로 즉각적인 해결이 아니라,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빚어 변화시키신다. 시편 기자들은 그 과정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 시편 62편은 말한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오늘날 교회는 회복과 축복을 말하지만, 정작 고난 속의 신앙을 말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탄식의 신앙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찬양도 받으시지만, 탄식도 받으시는 분이다. 오히려 탄식은 찬양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말해줄 수 있다. 찬양은 상황이 좋을 때도 할 수 있지만, 탄식은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을 향해 우는 자만이 진정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다.
시편의 탄식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 눈물이 흐르고, 마음이 부서지고, 삶이 무너질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은 반드시 고백으로 이어진다. “주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시편의 결론은 언제나 하나님이다. 고난은 그 결론으로 가는 긴 터널일 뿐이다.
이러한 시편의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고난 앞에서 말문이 막힐 때, 시편이 우리를 대신해 기도해준다. 그것이 시편의 위로이며 능력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울 수 있고, 그 눈물 속에서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 고난은 결코 끝이 아니며, 탄식은 곧 소망의 입구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잊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처럼 기도할 수 있다. 울면서라도, 무너지면서라도, 하나님을 향해 부를 수 있다면, 그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가장 진실한 발걸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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