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없이 자기를 아는 자는 없다

– 자아의 본질을 성경으로 묻다

사람은 스스로를 안다고 생각한다. 느끼는 것 기억하는 것 판단하고 선택하는 모든 것을 ‘내가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간단히 ‘나를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씀은 정반대의 선언으로 시작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예레미야 17:9). 이 말씀은 인간의 자의식이 결코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는 생각보다 나를 모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나를 잘못 알고 있다.

현대는 ‘자기 이해’의 시대다. 사람들은 자기를 찾기 위해 글을 쓰고 명상을 하고 테스트를 하고 수많은 감정의 기록을 남긴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은 사라져 있다.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성경은 인간이 자기를 아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분을 떠난 인식은 스스로를 포착할 수 없고, 그분의 말씀을 떠난 자아는 언제나 왜곡되고 흔들린다. 하나님 없이 자기를 보려는 모든 시도는 거울 없는 방에서 얼굴을 찾는 것과 같다.

아담은 타락 이전에 자아를 묻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거닐었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의 생명은 질문보다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후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해석하려 들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세기 3:10). 자아가 깨어난 순간은 곧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과 동시에 찾아왔다. 인간은 ‘나를 알게 되었지만’ 그 알게 됨이 곧 두려움과 은폐를 불러왔다. 인간의 자아는 처음부터 혼자 설 수 없었다. 하나님 없는 자아는 고립이며 방황이며 본질적으로는 죄의 열매였다.

성경은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9). 하나님은 아담이 위치한 장소를 모르셔서 이 질문을 던지신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존재를 향한 질문이다. “너는 지금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너는 누구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이것이 자아를 향한 하나님의 첫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질문은 결국 내가 누구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독립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피조물은 그 존재를 창조주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는 방향이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그 질문은 곧 내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방향의 문제다. 성경은 존재를 고립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 성경의 인간은 언제나 관계 안에서 규정된다. 하나님과의 관계, 말씀과의 관계, 언약과의 관계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만든다. 모세가 “나는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출애굽기 3:11)라고 물을 때 하나님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지 않으신다. “너는 능력이 있고 준비된 자다”라고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단 하나만 말씀하신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애굽기 3:12). 하나님은 모세의 자아를 ‘함께하심’이라는 관계 속에서 정의하신다.

사울은 자기를 높이기 위해 자기를 해석했다. 그는 자기 뜻을 따르며 제사를 드렸고, 자기 판단으로 전쟁의 질서를 구성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고, 다윗을 택하셨다.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나의 안고 일어섬을 아시며… 나의 모든 길을 아시나이다.” 자기를 아는 자는 곧 자기 안에 하나님을 모신 자다. 자기를 잊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아시기 때문에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아는 실재가 된다.

우리는 종종 자기를 찾기 위해 과거를 파고든다. 어떤 사람은 상처를 어떤 사람은 업적을 또 어떤 사람은 타인의 평가를 통해 자기를 정의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를 찾으려는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라고 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 이 말씀은 단순한 헌신의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반으로 한 존재’를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자기를 근거로 살지 말고, 자기를 근거로 믿지 말고, 자기를 근거로 결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참된 자아는 부인의 자리에서 다시 태어난다.

오늘의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찾으라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수많은 자기 정의와 자기 설명이 넘쳐난다. 하지만 결국 자아는 자기를 통해 실재할 수 없다. 진짜 자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받은 존재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나는 내가 만든 자아가 아니다. 나는 내가 설명한 자아가 아니다. 나는 말씀으로 다시 지음받은 존재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만 참되며 오직 그분 안에서만 실재가 된다.

– 자아의 회복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자기를 안다는 것은 단지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 아니다. 자기 분석이나 감정의 정리는 자아의 외곽을 정리할 뿐 중심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성경은 자기를 아는 길이 밖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온다고 말한다. 회복은 아래로 파고드는 내면 탐색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드는 데서 시작된다. “주의 얼굴을 내게 비추사 주의 길을 알게 하소서”(시편 67:1–2). 이 구절은 단지 축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다. 이는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다시 정위치하려는 영적 갈망의 기도다. 자아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을 때만 빛 가운데 놓인다.

자기를 향한 시선은 결국 ‘기준’을 세우는 작업이다. 어떤 기준으로 나를 보고 있느냐에 따라 자아는 전혀 다르게 형성된다. 성경은 인간이 스스로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이사야 55:8).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조차 다르다고 말씀하신다. 자아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 선물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자아의 본질이다.

에베소서 2장은 자아의 구조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다.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2–9).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본다. 첫째, 타락한 자아는 외부 영향에 종속된 상태다. 둘째, 그 자아는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 셋째, 자아의 회복은 인간의 자각이나 결심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러한 은혜의 회복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회복은 자기를 부인하는 반복 속에서 이루어진다. 자아의 회복은 자기 부인의 연속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바울의 이 고백은 자기를 무력화시키는 고백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강력한 영적 능력의 자리다.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만이 날마다 말씀으로 살아날 수 있다. 자아는 무너져야 다시 세워지고 내려놓아야 다시 일어난다. 십자가는 그래서 자아를 부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진짜로 세우는 자리다.

우리는 종종 자기를 회복하려 할 때 자기를 증명하려 한다. 더 잘하고 더 의롭고 더 신실해져야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로마서 5:8). 하나님은 우리가 자격을 갖춘 뒤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아가 가장 부끄럽고 초라한 그 자리에 계셨고, 그 자리에서 다시 불러내셨다. 자아의 회복은 사랑을 받는 데서 시작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이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1)

그러므로 자아의 회복은 내가 나를 설득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선언하시는 진리 안에 머무는 것이다. 말씀을 따라 자기를 보는 훈련 말씀 속에서 자기를 해석하는 반복 말씀이 자아를 규정하게 하는 순종 이것이 자아의 회복을 이루는 실제 과정이다. 자아란 결국 하나님의 시선으로 다시 구성되는 나다. 그 시선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이다. 그 시선은 요구가 아니라 부르심이다.

자아는 여전히 흔들릴 것이다 삶은 불확실하고 감정은 흐르고 정체성은 위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시선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예레미야 1:5). 자아의 회복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나를 내가 다시 믿는 자리다 그리고 그 자리는 항상 말씀 앞에 있다.

나는 누구인가. 그 물음은 다시 이렇게 끝난다 나는 말씀 안에서 지음받았고 말씀 안에서 회복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매일말씀저널 | 오늘의 세상 말씀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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